반도호텔 자리가 지금의 을지로 롯데호텔입니다

일제시대 흥남질소비료공장, 압록강 수풍댐을 가지고 있던 노구치 시다가후가 허름한 차림으로 조선호텔을 찾아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도호텔을 더 높게 만들고 조선호텔을 아래로 내려다보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서울 만들기] 38. 을지로 롯데타운 [중앙일보]

1996년 호텔롯데 일대 모습. [중앙포토]
1973년 10월 어느날 도시계획국장이던 나는 양택식 시장과 함께 총리실로 불려가 "호텔롯데 건설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김종필 총리의 지시를 받았다. 金총리는 신격호씨가 서울에 호텔를 짓는 건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모국에 들여오는 것과 같으므로 단순히 한 기업을 지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격호씨는 일제 말기 일본으로 건너가 시게미쓰 다케오란 이름으로 롯데제과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그해 4월 일본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 호텔사업을 위해 신청한 외국인 투자 및 차관 인가신청서가 경제기획원을 통과했으며, 주요 신문들은 롯데가 을지로1가 반도호텔 일대에 국내 최고층 특급호텔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보도했었다. 조선호텔과 함께 서울의 최고급 호텔이었던 반도호텔은 일제 때 흥남질소비료를 경영하던 일본인이 지은 것으로 광복 후 정부가 인수해 관광공사에서 운영해왔다. 74년 6월 반도호텔에 대한 공개 매각 입찰이 실시됐다. 말이 공매 입찰이지 사실상 정부 지원을 받은 롯데의 단독응찰이었다.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이 있는 소공동에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었다. 일제는 조선시대 남별궁터에 조선호텔과 총독부도서관을 지었다. 총독부도서관은 광복 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바뀌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립중앙도서관을 남산 어린이회관으로 옮기고 도서관 터를 호텔롯데에 팔라고 지시했다. 정말 어이없는 지시였지만 당시 언론은 이 같은 사실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으니 일반 시민이야 전혀 알 수 없었다. 국가 소유의 국립중앙도서관도 일반 공개 입찰의 형식을 거쳐 롯데로 넘어갔다.

마침내 롯데는 원구단과 산업은행.한일은행 건물을 제외한 소공동 일대, 을지로1가.남대문로 금싸라기 땅 등 7천여평을 확보했다. 국가 소유의 반도호텔.국립중앙도서관은 쉽게 사들였으나 민간 소유의 땅은 국가권력을 업고 반강제로 매입했다. 서울시는 호텔롯데 부지 일대를 도시계획상 '특정가구 정비지구'로 지정했다. 이는 호텔롯데 건립을 위해 기존 '재개발지구'규정에 끼워넣은 특례였다.

당시 이 일대는 번듯한 건물들이 많아 재개발지구 지정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롯데호텔 건립을 지원하기 위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고, 건축법도 개정됐다. 롯데는 호텔 건립에 따른 부동산취득세.재산세.소득세.법인세 5년간 면제 등 엄청난 세제 특혜도 받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호텔용 가구.침구 등 각종 물품에 대한 관세도 면제됐다.

그런데 문제는 호텔롯데 옆에 지어진 롯데쇼핑센터였다. 호텔롯데 기본계획에는 호텔 본관의 동쪽인 산업은행과 한일은행 사이에 9층짜리 부속건물 건립이 포함돼 있었다. 내가 부속건물의 용도를 물었더니 롯데 측은 "1,2층은 투숙객을 위한 쇼핑센터고, 나머지는 호텔 부속시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내가 도시계획국장을 물러난 뒤 부속건물은 25층으로 올라갔고, 9층까지 모두 백화점으로 둔갑했다. 당시 서울시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강북지역 인구집중 억제였으므로 강북에 대형 백화점 건립을 허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서울시는 "백화점 허가는 불가능하지만 쇼핑센터 허가를 금지한 법은 없으니 이름을 백화점 대신 쇼핑센터로 바꾸면 될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내놓았다. 79년 10월 26일 朴대통령 재가를 받아 롯데쇼핑센터 건축 허가가 났다. 바로 10.26 사건 몇 시간 전이었다.롯데쇼핑센터는 朴대통령이 신격호씨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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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의 유래

2008.07.05 12:32 from 분류없음
태종이 둘째딸 경정공주를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출가시키면서 아담한 집을 지어주었다.

이 집이 작은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으로 불려지면서

그 마을이름도 소공주동 - 소공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소공동]은 北倉洞, 太平路2街, 南大門路 2街,3街,4街, 西小門 洞, 貞洞.巡和洞 義州路1街 忠正路 1街, 小公洞등 11개 法定洞과 봉래동1가의 일부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 명칭이다

[소공동의 동명]조선태종의 둘째딸인 慶貞公主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곳을 한자로 소공주동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북창동은 조선시대 관아인 선혜청의 북쪽창고가 있는데서 붙여졌으며, 서소문동은 서울성곽 8문의 하나인 서소문에서 유래되었고 덕수궁 북서쪽에 위치한 정동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능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는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의주로변 이화여고와 중앙일보사가 자리한 곳에 위치한 순화동은 광복후에 순청동의 「巡」자와 화천정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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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즉, 어느정도 먹고살게 된 이후의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서울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김현옥시장에 의한 전무후무한 여의도택지개발사업, 김수근팀에 의한 여의도 도시설계과정과 그 좌절, 도심부 재개발 사업, 과도한 특혜 아래서의 롯데의 성장 등이 그 시대 도시발전의 주요 사건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점은 왜 필자는 그토록 '도심재개발이란 건물의 고층화, 대형화를 이루어야'만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대부분의 도심재개발을 자본력과 추진력(행정주체와의 밀접성)을 가진 대기업이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까지도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맹신이란 점이다. 도시의 고밀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인지, 도시적 미감을 선사하는 쾌감때문인지, 전혀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모르겠다.

읽으면서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던 '을지로 1가 롯데타운 형성과정-외자유치라는 미명하에 베풀어진 특혜'는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성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이렇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일본에서 굴지의 기업가으로 성공한 신격호 롯데 회장의 재산을 국내로 대량 유입한다는 목표로, 전두환 전대통령은 지연, 친인척 관계의 친밀함으로 인해 롯데가 을지로 1가를 롯데타운으로 만드는데 아낌없는 행정적 지원을 했다.

한국의 관광산업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롯데가 호텔을 지을 부지를 선정한 곳은 을지로1가였다. 반도호텔, 국립도서관, 한일은행, 산업은행등은 국가소유부지로, 서울은행 등은 민간소유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도호텔의 매각입찰은 일반공개입찰 방식을 취하였으나, 물론 짜고치는 단독응찰이었다. (공개입찰을 가장한 단독응찰의 행태는 국가소유자산을 민간불하하는 경우에 적지않게 행해졌고, 그에 대한 대가는 물론 정치비자금이었을 것이다.)

국립도서관은 신증축의 필요가 있는 상태이긴 하였으나, 대안검토없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명에 의해 남산에 위치한 어린이회관 건물로 이전하게 된다. (이것역시 도서관 건물로서 적합하지 않아 추후에 반포로 이전하게 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말이다.)

특정가구정비지구(상태가 양호하여 재개발지구로 지정하기 부적합하지만 위치가 특이하여 그 외관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을때 재개발지구와 같은 공권력의 지원으로 재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지정하는 지구)라는 도시계획법도 새로 만들어주었고, 외자도입법(부동산취득세, 재산세, 소득세, 법인세를 5년간 부여하지 않고, 5년이 지난 이후 3년간 규정세액의 50%만 부과하며, 자본재에 대한 관세 및 물품세는 영구히 면제하는 법-이는 대한민국국적을 보유하더라도 10년이상 외국에서 영주하고 있는 자에게도 해당되기에 한국국적을 가진 신격호에게도 적용가능했다)이라는 특혜법도 마련해 주었다.

거기다 특정지구개발촉진법(다양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이미 납부한 세금을 되돌려주며 자금융자 지원을 해주고 개발지구내의 공공시설을 지체없이 정비해주는 지원을 보장하는 법)까지 신설하여 말그대로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그 당시 강북억제책(=강남활성화책)의 한 방안으로 강북 주요 지역에는 인구를 발생시키는 일체의 시설 신축을 금지했고 전답이나 임야를 택지로 변경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 까탈스런 상태였다. 그러나 롯데는 25층의 부속건물을 신축하여 외국인관광객의 쇼핑을 위한 부대시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봐도 백화점이었고 강북에 백화점시설을 신축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터치할 수 없었고 곤란한 서울시 관계자들은 명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타로 명명하자고 타협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는 쇼핑센타의 개념이 널리 사용되지 않아 법적인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롯데백화점의 정식명칭은 지금도 '롯데쇼핑(주)'라고 한다.

출처
http://yoonhee.egloos.com/1526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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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前도시계획국장 손정목씨 개발비화 책 펴내

"朴대통령 워커힐 나들이 위해 청계고가 세워"

 
▲ 서울 도시개발의 비화를 책으로 공개한 손정목씨는 “7년간‘이게 바로 한국 현대사다’란 심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얘기를 썼다”고 말했다.  
 
“그 시절 서울시장은 임명직이니까 임명권자(대통령) 눈에 들려고 도시 개발을 했거든요. ‘전임자(정책) 불계승’이란 기막힌 원칙까지 더하면서 지금 서울이 이 모양이 된 겁니다.”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을 지낸 손정목 (孫禎睦·75)씨가 서울 개발의 비화를 다룬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전 5권, 한울)를 18일 펴냈다. “서울시 도시계획은 개발독재 시대의 대담·기발·강압·부조리 그 자체였다”는 날 선 증언이지만, “잘했다 못했다 가치 판단보다 풍부한 사실(fact)로써 격동의 서울 50년사(史)를 남기려 했다”고 그는 말했다.

“청계고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를 위해, 강변도로는 김포공항행(行)을 위해 놓았다는 것이 건설의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죠. 국내 최초 골프장인 능동 서울컨트리클럽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것도 워커힐 오가는 길에 한가롭게 골프 치는 족속을 보고 못마땅해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었고요.”

그는 프라자호텔(태평로)이 ‘치부 가리기’ 속셈으로 세워졌다고 말했다. “1966년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존슨 (전) 대통령 방한 환영식 때 남산 무허가 빈민촌이 전 세계에 보여졌고, 미국 교민들도 ‘낯 뜨겁다’고 난리가 났었거든요. 고층 호텔을 올려 남산 조망을 좍 가린 것도, 화교마을을 없앤 것도 다 같은 이유였죠.”

“롯데호텔(소공동)을 지으려 특별법을 세 번이나 만들었고, 산업은행을 쫓아내 주차장을 만들었다” “서대문 금화 시민아파트를 산허리에 세우려는 계획에 대해 실무자들이 만류하자,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인다’며 핀잔을 주었다” “남산 1·2호 터널은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직후 용산·중구 주민 대피용 방공호로 만들었다” “소공동 지하도는 전시(戰時)에 서울시청을 두기 위한 구자춘 전 시장 작품이었다”…. 손씨는 명예훼손이 될까 봐 신문기사·국회속기록·판결문을 꼼꼼히 챙겼고, 1967년부터 모은 시정(市政) 관련 기사들은 캐비닛 2개를 꽉 채울 분량이라고 했다. 관련자들 실명을 거론한 것도 ‘떳떳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남 개발’은 엉뚱한 계기에서 비롯됐다고 손씨는 설명한다. “강남 개발 시작은 19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이었고, 그 목적은 6·25 때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시민 피란용’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으로 강남 개발이 본격화됐고, 박종규(경호실장)·김종필(총리)·김정렴(비서실장) 등의 지원을 받은 실무 책임자(서울시 도시계획과장)가 박 대통령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제일은행 돈을 빌려 개발과 투기를 동시에 진행한 악역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고속도로 땅은 ‘구획정리사업’ 명목으로 땅을 기부받는 방식으로 했으며, 서울~부산 간 토지수용 보상 비용은 모두 합해 50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손씨는 ‘개발독재’ 시기를 “5·16부터 6공화국 말까지”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격변기였던 김현옥·양택식·구자춘 시장 재임 당시를 위주로 했지만, ‘88올림픽과 도시계획’ ‘수서 사건’ 등 5·6공화국도 책에서 다룬 까닭이다.

손씨는 29세에 예천 군수(최연소)로 취임해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을 22년간 맡았고 77~94년 서울시립대 교수·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시청에서 ‘노른자위’ 자리를 맡았지만, 가진 거라곤 35평 아파트와 유학 보내 대학교수가 된 두 아들뿐, 자가용·휴대전화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땅 투기했더라면 형무소에 갔거나, 주색(酒色)에 곯아 벌써 저 세상 가 있지 않겠어요?” 그는 “대장암·위암 수술을 받아가며 7년간 적은 ‘유서 같은’ 책을 낸 것이 너무 기뻐 하늘을 향해 쾌재를 불렀다”고 했다.


(글·사진=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입력 : 2003.08.18 19:19 30' / 수정 : 2003.08.19 05:08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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