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08. 7. 27. 11:25
별칭은 죽음의 천사.

1911. 3. 16 독일 귄츠부르크~1979. 2. 7 브라질 상파울루 근처 엔세아다다베르티오가.

1943~45년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 근무했던 나치 의사(→ 나치당).

독가스실 운영을 지휘했고 인종 연구를 위해 수용자들을 상대로 의학 실험을 시행했다. 멩겔레는 1920년대에 뮌헨에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인종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에서 의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나치 돌격대에 자원 입대했고, 열렬한 나치 당원이 된 그는 1934년 새로 세워진 유전생물학 및 인종위생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바펜 친위대의 군의관으로 활동하다 .

1943년 하인리히 히틀러에 의해 아우슈비츠 근처에 있는 비르케나우 집단학살수용소의 수석 의사로 임명받았다. 그곳에서 멩겔레와 휘하 연구진은 입소 유대인들을 골라 출산과 단산에 관한 연구를 했으며, 독일 민족의 번성이라는 목적 아래 생식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수용자들에 대한 의학 실험을 지휘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쌍둥이 연구에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지하로 잠복해서 바이에른 주의 로젠하임 근처에 있는 한 농장에서 마부 행세를 하며 4년을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1949년 제노바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탈출했다고 한다. 1958년 우루과이에서 본명으로 2번째 결혼을 했으며, 1959년에는 파라과이에서 '호세 멩겔레'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취득했다(이 시민권은 1979년에 취소되었음). 1961년에 브라질로 이주한 것 같고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예전에 나치였던 볼프강 게르하르트(나중에 유럽으로 돌아갔음)와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 브라질·독일(서독) 그리고 미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수사팀은 멩겔레가 게르하르트의 신분을 이용하다가 1979년 수영 도중 뇌일혈로 사망했으며 게르하르트의 이름으로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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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멩겔레는 1911년 3월 16일 독일 바바리아(Babaria) 지방 군즈부르크(Gunzberg)의 독실한 카톨릭 신도 집안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멩겔레는 과학과 인류학 방면에서 일하기를 꿈꾸었다. 193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뮌헨 대학에 입학했다. 뮌헨은 바바리아의 주도였고, 당시는 국가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멩겔레가 나치 국가주의 이념에 휘말려든 것은 뮌헨에서 공부할 때이다.

멩겔레는 뮌헨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곧 우생학(eugenics)으로 관심이 옮아간다. 우생학이란 유전학의 한 갈래(오늘날 우생학은 일반적으로 초기 유전학의 발견에 정치적 주의가 결합된, 그로 인해 목적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결과만 취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간주된다)로 그는 인간의 신체적 기형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 흥미를 품고 있었다.

멩겔레는 1935년 박사 학위를 받고 1936년 라이프치히 대학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8년 멩겔레는 친위대(Schutzstaffel: SS)에 선발되었다. SS 회원 자격 덕분에 그는 큰 권력을 얻게 되었다.

멩겔레는 1943년 아우슈비츠로 배속되었다. 명목상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인간 유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표는 초인 독일 인종을 만들기 위해 인류 전체에서 열악한 유전 인자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목격자들은, 멩겔레는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을지를 결정하는 선별 작업을 오락으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고 진술한다. 또한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다고도 한다. 그는 1분 동안이나 수용자를 잔혹하게 구타하고 나서는 활기찬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멩겔레가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생사자 선별이나 구타 때문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실험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어린이들을 해부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성인 남자나 소년들을 거세했다. 여성들의 '인내력을 시험하려고' 전기 충격을 가했다. 그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잔인하고 역겨운 수많은 실험은 약간의 증거만 있을 뿐이다.
(뒤에서 쌍둥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멩겔레는 쌍둥이들 말고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는 유대인 중 절름발이, 소인증 환자 같은 특이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수용자들을 모아서 별도의 막사에 수용하도록 지시했다 한다. 물론 그러한 질환과 관련한 실험 대상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멩겔레가 수집한 자료들은 모두 카이저 빌헬름 인류학 연구소의 폰 페르슈어(Von Verschuer) 박사에게 보내졌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 폰 페르슈어 박사가 파기해서 총량은 추정되지 않고 있다.)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멩겔레가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긴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오히려 그는 누가 언제 죽을지를 결정하는 권력을 즐겼다.

멩겔레가 선호하는 '종자'는 쌍둥이였다. 그는 쌍둥이에 매력을 느껴서, 그들을 매우 잘 대해 주었다. 그는 경비병들에게 쌍둥이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쌍둥이들은 더 많은 식사, 좋은 옷, 좋은 생활 환경을 누렸다. 그들은 '멩겔레의 아이들'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것이 멩겔레가 쌍둥이들을 아꼈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멩겔레가 그토록 돌보아 주었던 쌍둥이들은 그에게 가장 주된 실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눈 색깔이 바뀔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쌍둥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했다. 이 때문에 때로 실명하는 아이들이 생겼다. 이들 쌍둥이가 죽으면, 그는 그들의 눈을 수집해서 집무실 벽에 핀으로 꽂아 두었다.

어떤 쌍둥이들은 마취도 하지 않고 늑골을 절제당했다. 또다른 쌍둥이들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 데 얼마나 걸리나를 관찰하고자 전염성 물질을 주사당했다.

멩겔레의 실험은 진정한 과학 연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리아 족의 우수성이라는 나치식 환상에 대한 광적이고 야심찬 집착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유전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치식 우생학의 한계 중 하나는, 그들이 우수한 형질로 생각한 게르만 족의 특성 중 어떤 것은 유전학적 열성이라는 것이다.)

주 텍스트에서 설명한 것 외에 멩겔레가 행한 생체 실험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조 화이트(Joe E. White)가 쓴 책 ≪불길 속의 아이들≫(Children of the Flames)에 따르면 쌍둥이 3000명 가량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는데 이 중 200여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 혈액형이 다른 쌍둥이 중 한 쪽의 피를 뽑아서 다른 쪽에 수혈
- 성전환 수술 (성별이 다른 쌍둥이의 생식기 교체)
- 고압실에 가두고 대기압에 얼마나 버티는가를 실험 (관동군 731부대에서도 행해졌다.)
- 인공 '샴 쌍둥이' 만들기

멩겔레는 1945년 붉은 군대가 진격해 올 때 아우슈비츠를 탈출해서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70년대에 유대인 '최종 해결책' 제창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그들은 끝내 멩겔레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1979년 브라질에서 수영중 익사했다.


【더 읽어볼 거리】
http://www.crimelibrary.com/serial_killers/history/mengele/index_1.html
(범죄 박물관 대량 학살자 카테고리 멩겔레 항목)
http://www.rotten.com/library/bio/nazi/mengele/
(엽기 사이트 rotten.com의 나치 전범 중 멩겔레 항목)
http://www.candles-museum.com/mengele.htm
(CANDLES 홀로코스트 박물관 멩겔레 항목: 참고문헌 수록)
http://www2.ca.nizkor.org/faqs/auschwitz/index.html (아우슈비츠 수용소 FAQ)


참고한 곳:http://www.nobelmann.com/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각종 인체실험으로 수 십 만 명을 살해해 `죽음의 천사'란 별명을 얻은 독일 의사 요제프 멩겔레(1979년 사망)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뉘우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일간 `이디오트 아하로노트'가 27일 실은 멩겔레 서신 발췌본에 따르면 멩겔레는 친지들에 보낸 편지에서 평범한 일상생활만 묘사했을 뿐 전범 행위는 후회하지 않았다.

1949년 연합국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 브라질 등 남미에서 평생을 숨어 지낸 멩겔레는 1976년 2월 한 친구에 보낸 편지에서 "내일 오전 일찍 (정원사인) 루이스가 올 것이며, 우리는 곧바로 정원 손질에 나설 것"이라고 쓰는 등 일상 생활만 늘어놓았을 뿐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이디오트 아하로노트는 지적했다.

편지는 또 "1주일에 1-2번 나는 편지를 부치고 전기요금을 내고, 독일 빵집에서 빵을 사먹기 위해 마을로 나간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작은 기쁨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다른 편지는 "이따금 그녀는 내가 아침을 준비한 뒤에야 나타나거나 아예 오지 않기도 한다"고 쓰는 등 게으름을 피우는 브라질 출신 가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멩겔레는 이밖에 마지막 순간까지 아리안족(독일민족)의 우월성을 믿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찬양했다고 브라질의 한 신문이 앞서 보도했었다.

독일 주간잡지 `분테'가 1985년 보도했던 멩겔레의 아들 롤프의 편지도 끊임없이 체포 걱정에 떨고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고단한 도망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나치 정권은 끝까지 옹호하고 있다.

멩겔레는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할 수용자와 가스실에 보낼 대상을 선별하고 어린이와 난쟁이, 쌍둥이 등에 대한 각종 인체실험을 해 40만여 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용홀더채택으로 귀차니스트에게딱~~~!!  이런 책갈피 봤어??

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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