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08. 7. 10. 11:11

적벽대전의 진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고 주유가 화공법을 씀으로써, 천하무적일 것 같았던 조조의 100만 대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려는 꿈을 미뤄야 했다. 적벽대전의 승부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 장강 이북을 석권한 조조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오의 손권을 치러 나선다. 손권을 물리치고 나면, 변변한 세력 기반이 없는 유비나 그 밖의 몇몇 제후들은 손쉽게 물리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게 만들고 주유가 화공법을 씀으로써 조조군은 크게 패했고(기원전 208년), 조조는 본거지로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조조의 군대는 100만에 달했을까? 7만에 불과했다는 말도 있고 10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략 23-25만 정도였다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당시의 병력 규모를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100만이라는 이야기에는 과장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로 손권과 유비의 병사들은 약 5만 정도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처럼 고도로 발달된 무기가 없었던 고대 전쟁에서는 병력의 많고 적음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고대에는 다른 일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군사 훈련과 전쟁에만 전념하는 병사, 즉 직업 군인이 적었다. 큰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필요하게 되면, 일반 농민들 가운데 일정한 연령대의 남자들을 모두 징발하여 병사로 삼았다. 더구나 병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실제의 전투보다는 식량이나 말먹이, 즉 군수물자를 운반하는데 동원되었다. 삼국지를 보면 장수끼리 겨루어 한 쪽 장수가 죽임을 당하면, 병력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죽임을 당한 장수 쪽 병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평소에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받고 전투 경험도 많은 병사들은 비교적 드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한 병력 숫자야 어떠했든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던 조조가 패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고 주유가 화공을 펼쳤기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보면 당시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조조의 병사들 가운데 사망자가 많았고, 이로 인해 조조의 군사력이 약해졌다고 한다. 동남풍의 경우에도 제갈공명이 칠성단에서 빌었다기보다는, 그 지역의 기후 변화 특히 계절풍 예측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당시 유행했던 역병은 무엇이었을까? 장강 유역에서 발생하는 풍토병, 정확히 말하면 주혈흡충병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혈흡충은 주로 조개류에 기생하는데, 강이나 호수 등 민물 속에 있다가 수영을 하는 경우 피부를 뚫고 들어오거나, 오염된 물을 마시면 감염된다. 환자는 설사, 폐렴, 간염, 간경변, 발열, 피부염, 두드러기 등의 증상을 보이며, 저항력이 약한 사람은 죽기도 한다. 이 병은 비위생적인 환경, 특히 깨끗하지 않은 물이 있는 곳에서 자주 발생하며, 오늘날에도 중국의 양자강(장강) 유역에서 비교적 흔한 병이다. 한편 장강 유역 출신인 동오의 병사들은 북쪽 지방 출신인 조조의 병사들에 비해 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적벽대전 (赤壁大戰) 단어장에 추가

요약

중국 후한 말기인 208년 손권·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와 후베이성 자위현 서쪽에 있는 적벽에서 싸웠던 싸움.

설명

중국 후한(後漢) 말기인 208년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와 후베이성[湖北省(호북성)] 자위현[嘉魚縣(가어현)] 서쪽에 있는 적벽에서 싸웠던 싸움. 원소(袁紹)를 토벌하고 화베이[華北(화북)]의 평정에 성공한 조조는 208년 승상이 된 뒤 남하하여 유표(劉表)의 영토가 된 형주(荊州)를 공략했다. 유표의 아들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유표의 식객이었던 유비는 일단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제갈량(諸葛亮)의 활동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손권의 부하 가운데에는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유(周瑜)·노숙(魯肅)은 손권에게 유비와 동맹해서 형주를 차지할 것을 권했다. 손권의 무장 황개(黃蓋)가 화공(火攻)의 계략을 세워 쇠사슬로 묶어 놓은 조조의 전함을 불태워버렸다. 그 결과 육지로 달아난 조조군은 관우(關羽)에게 패했고 진중에 유행병까지 돌아 할 수 없이 북쪽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훗날 중국 천하가 3분되는 원인이 되었다.

분류
역사·고고학·문화재 > 아시아사 >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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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봉 : 2008. 07. 10
  • 정보 : 중국|15세 이상 관람가|132분
  • 감독 : 오우삼
  • 출연 : 양조위, 금성무, 장첸, 린즈링, 장풍의, 후 준, 조미
  • 시놉시스 :위, 촉, 오 3국이 대립하던 서기208년 중국.. 천하통일을 위해 중국대륙을 피로 물들여가던 ‘위’의 조조(장풍의)는 뛰어난 통치력과 막... 더보기

전용홀더채택으로 귀차니스트에게딱~~~!!  이런 책갈피 봤어??

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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