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찬    |  參贊    


조선시대 의정부 소속의 정2품 관직.


1415년(태종 15) 의정부 기능을 약화시키기 위해 관제 개편한 종2품의 의정부찬성사가 좌·우참찬으로 분리, 그 중 우참찬을 참찬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 뒤 정원이 2명으로 증원되었고, 1437년(세종 19) 의정부 기능 강화에 힘입어 참찬은 다시 좌·우참찬으로 바뀌었다. 1896년(고종 33) 내각을 의정부로 복원하면서 칙임관(勅任官)의 총리대신과 총서를 의정·참정·찬정·참찬·총무국장 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7년 의정부제가 다시 내각제로 바뀌면서 이 명칭도 함께 폐지되었다. 의정을 보좌하고 의정부사를 운영하면서 국정에 참여했던 참찬은 의정부의 강약에 따라 그 부침(浮沈)도 심하였다.









엠파스백과사전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에 두었던 정2품직.

1392년(태조 1) 관제제정 때 문하부(門下府)에 종1품 찬성사(贊成事)를 2명 두었다.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새로 설치했는데, 1414년(태종 14) 4월 문하부 찬성사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로 고쳐 2명을 두었다. 같은 해 6월 좌참찬·우참찬으로 고쳤으나 다시 1415년 1월 좌참찬을 찬성(贊成)으로, 우참찬을 참찬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다. 1437년(세종 19) 10월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면서 참찬을 1명 늘려 좌참찬·우참찬으로 나누어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가, 1896년 내각제를 의정부제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1907년 다시 의정부제를 내각제로 개편하면서 폐지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에 두었던 정2품직.

1392년(태조 1) 관제제정 때 문하부(門下府)에 종1품 찬성사(贊成事)를 2명 두었다.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새로 설치했는데, 1414년(태종 14) 4월 문하부 찬성사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로 고쳐 2명을 두었다. 같은 해 6월 좌참찬·우참찬으로 고쳤으나 다시 1415년 1월 좌참찬을 찬성(贊成)으로, 우참찬을 참찬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다. 1437년(세종 19) 10월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면서 참찬을 1명 늘려 좌참찬·우참찬으로 나누어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가, 1896년 내각제를 의정부제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1907년 다시 의정부제를 내각제로 개편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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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같은 임금에 황희 같은 정승" 이란 말이 있다. 세종 같은 성군이 나기 위해서는 황희 같은 명재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황희 같은 명재상이 빛을 발하려면 세종 같은 성군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이 말 한마디에서 볼 수 있듯 세종과 황희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조합' 이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맹사성 같은 인물이 늘그막에도 좌의정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령의 황희가 영의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희는 세종조를 통틀어 가장 오래 재상을 지냈을 뿐 아니라 재물이나 명예에도 욕심이 없어 '청백리' 로도 명망이 높다. 아마 황희가 세종과 더불어 많은 정치인들의 표상이 되는 것도 뛰어난 정치적 능력 뿐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렴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청백리' 황희가 사실은 만들어진 허상이라면 어떠할까? 사실 황희는 청백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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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를 일컬어 "그 만한 인물이 없으니 반드시 중용하라." 고 하였고, 세종은 황희를 일컬어 "그대가 있고 비로소 과인이 있다." 고 했을 정도다. 이만큼 '황희' 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 잠시 쉰 때를 빼고 황희는 태종과 세종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24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의 모든 일을 관장했던 황희는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했음은 물론이고, 세종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어두운 법. '권력의 중심부' 에 있던 명재상 황희는 그 누구보다 '비리사건' 으로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가 사간원과 사헌부의 단골 '탄핵 대상' 중 한명으로 보일 정도로 자주 황희의 비리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뇌물수수와 관직 알선이었다. 한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그에게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이 바로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 마디로 땅문서와 벼슬자리를 맞바꾸자는 거래였던 것이다.


황희의 비리를 포착한 사헌부는 그 즉시 황희의 비리 사건을 조정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심하자 세종은 마지못해 황희를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다 곧 다시 영의정으로 기용하여 황희의 복권 시나리오를 진두지휘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 한번은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사망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의 법도로 따지자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살인사건은 아주 '조용하게' 처리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샀다. 이 사건의 수습과정에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로,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국무총리와 부총리, 법무부 장관과 차관, 감사원장이 모두 비리 사건에 휘말린 '초특급 사건' 인 셈이다.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실세라고 불리던 황희-맹사성이 동시에 수습에 나섰으니 그 왜곡과 조작이야 오죽했겠는가. 이 사건은 그렇게 황희와 맹사성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다.


허나 이런 직권 남용을 곧이 곧대로 볼 사헌부가 아니었다.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기 시작하자 그 배후에 여러 지방 관아 수령들 뿐 아니라 형조판서 서선이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뒷배를 봐주고 있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있을 수 없는 조작사건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다."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황희를 파직했다가 채 1년도 안 되어 다시 기용하는 파격의 은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같이 사건에 연루됐던 맹사성이 일주일만에 복직한 것을 봤을 때, 조금은 늦은 복권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황희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비리 사건에 휘말린데다가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훗날 이 소문은 그 실체가 어디있는 것인지를 놓고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황희의 비리와 간통사건을 두고 이런 평가까지 내린바 있다.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호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가 장인 양진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조금 과장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생각해 온 '청백리' 황희와는 거리가 먼 평가가 아닐 수 없다. 황희는 이 사건 뿐 아니라 첨절제사 박유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발각이 되어 구설에 오르기도 했고, 박용이라는 역리에게 말(馬) 여러 필을 선물 받고 청탁성 편지를 썼다가 사헌부에게 꼬리를 밟혀 의금부까지 왔다갔다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런 수많은 '비리 사건' 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세종의 총애는 그치지 않았다. 황희가 파직당했을 때에도 세종은 언제나 모든 사무를 황희에게 물어보고 처리하였으며, 황희가 고개를 흔든 것은 가납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종시대는 실질적인 세종과 황희의 공동정권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희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처절한 탄핵' 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데에는 적극적인 세종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렇게 황희를 총애했을까. 세종은 누구보다도 황희의 비리사건을 꿰뚫어 보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에게는 '비리사건' 조차 눈 감아 넘겨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정치력이 있었다. 세종이 필요했던 것은 황희의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의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약간의 흠집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사실상 세종이 황희의 청렴함에 감탄하고 탄복했다는 에피소드는 후세사람들의 '각색' 으로 탄생한 픽션이다.


황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청백리' 였다기 보다는 대부분의 정치인과 같이 비리 사건에 자주 연루되었던 평범한 고위 공직자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황희만큼 세종의 안목과 비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위 아래를 아우르며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종에게 있어서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 조합이야말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정리하자면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24년 동안 재상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도덕성마저 가릴만큼의 뛰어난 재능과 정치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직과 복권을 거듭하며 혹독한 세월을 보냈던 황희는 그 후, 세종의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세종의 대업을 보필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 에 적혀있는 그 엄청난 스캔들조차 황희의 공적으로 인해 승화되는 것을 보면 정치야말로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생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황희에 대한 악평을 서슴없이 남겨놨던 사관들도 훗날에 이르러서는 '개과천선' 했던 황희를 두고 이런 평을 내린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에 단점이 있었으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생각이 깊고 함부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다짐한 일은 위에 반드시 아뢰어 행하였으며 행함에 있어서도 자주 바꾸지 않아 나라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관후하고 침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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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뇌물수수죄조말생을 다시 기용한 까닭은?   원본링크
... 빼앗는 선에서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종은 2년 후인 세종 10년 윤4월에조말생을 사면하여 유배를 풀어주었다. 2년후인 세종 12년 4월, 세종은조말생의 직첩도 돌려줄 것을 명했다.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관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2008-03-15 08:45:00




조말생은 태종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았던 능력있는 관리였습니다. 세종도 그런 조말생의 능력을 인정해 상당히 중용했습니다. 하지만 조말생은 상당히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도련 뇌물 사건이었습니다. 김도련의 뒤를 봐준 인물들 중 조말생이 있었던 것 입니다. 조말생은 당대의 실세였기 때문에 그 여파는 더욱 컸고 결국 귀양을 가게됩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대간들이 처형 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다시 조말생을 불러 중용하게 됩니다. 조말생은 이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째거나 조말생은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입니다. 드라마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조말생뇌물사건

조선시대 최대의 사기사건은 세종 때의 김도련(金道練)이 꾸민 노비조작 사건입니다.

김도련의 할아버지 김원룡(金元龍)은 친구 김생(金生)과 함께 일찌기 함경도(당시 함길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김도련의 대에 이르러 중앙 정게에 진출했고, 할아버지의 친구인 김생은 그 지방에서 계속 농사를 지었는데 일이 잘 되어 엄청난 논밭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가진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도련은 문서 하나를 조작하여 엄청난 재부를 모으는 희한한 생각을 짜냈습니다. 즉 자기 조부의 친구인 김생을 자기 조부의 노비였는데 함길도로 달아난 것으로 서류를 조작한 것입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므로 자기 할아버지의 노비면 그 후손과 후손의 노비들은 저절로 자기의 노비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전재산과 함께 노비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던 시대에 천 명이 넘는 노비라는 엄청난 재산이 굴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김도련은 노비문서를 조작하는데 성공하여 양민인 김생의 후손 426명을 통짜로 노비로 만들었고, 그들의 전재산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모두 집어삼킨 것입니다. 이 성공을 확실히 굳히기 위해 정계 여기저기에 뇌물을 바쳤는데 뇌물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노비였습니다.

좌의정 이원은 4명, 우의정 조연은 15명을 받았고, 곡산 부원군 연사종은 10명을 받았고, 병조 판서 조말생은 36명, 참의 조숭덕은 8명을 받는 등 노비들이 뇌물로 쓰였습니다. 그밖에 우의정 정탁·평성 부원군 조견·공조 참의 조숭덕은 사건이 밝혀진 세종8년에는 이미 죽었으므로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당시 화폐로 7백 80관(貫)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시세로 적어도 10억대는 되지 않을까요.... 노비는 무척 값이 높은 재산이었습니다.

사헌부의 조사로 이 일이 밝혀지자 이원은 여산에,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연사종은 강원도에, 조말생은 충청도 회인으로 각각 귀양가고 형조의 수사관 박고와 정랑은 곤장을 맞고 파면, 예조참판 하연·경창부 소윤 이숙치·이조정랑 조극관·판내자시사 김타·첨지통례문사 임인산·호조 정랑 이효례, 지승문원사 황보인·부정 남지·지안산군사 김이공·지의천군사 윤간·정주목사 남궁계등은 파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하여 주범인 김도련은 어떤 처벌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노비 132명만을 압수당했을 뿐이며, 양민이었다가 졸지에 억울하게 노비의 신세가 된 김생의 후손들 역시 풀려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비로 남았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노비임은 물론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99% 성공한 것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전형적인 권력형 사기입니다. 대동강물을 팔았다는 김선달의 사기와는 그 종류가 다른, 아주 악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요즘의 정치·사회현상과 비교해도 충분히 음미할만 한 사건입니다. 요즘도 이런 일이 있지요?
출처 : 세종실록







팀워크 살리는 리더십 엠파스 | 2008.05.04
... 반대했다. 반면 조말생은 궁중 재물을 관장하는 상의원에 장영실이 적임자라고 찬성했다. 마지막에 황희가 나섰다. "용맹이 출중한 관노 김인을 무관으로 발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



지금 황희정승이 그리운 까닭 엠파스 | 2008.04.21
... 두고 한 말이다. 황희를 신임하고 시종 중책을 맡긴 세종도 보통 임금은 아니었다. 국왕의 정책노선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비판해오는 황희의 조언을 세종은 최대한 수용하곤 했다. 조말생이나 하륜과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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