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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7. 20:44
세종이 뇌물수수죄조말생을 다시 기용한 까닭은? 원본링크
... 빼앗는 선에서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종은 2년 후인 세종 10년 윤4월에조말생을 사면하여 유배를 풀어주었다. 2년후인 세종 12년 4월, 세종은조말생의 직첩도 돌려줄 것을 명했다.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관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2008-03-15 08:45:00
조말생은 태종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았던 능력있는 관리였습니다. 세종도 그런 조말생의 능력을 인정해 상당히 중용했습니다. 하지만 조말생은 상당히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도련 뇌물 사건이었습니다. 김도련의 뒤를 봐준 인물들 중 조말생이 있었던 것 입니다. 조말생은 당대의 실세였기 때문에 그 여파는 더욱 컸고 결국 귀양을 가게됩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대간들이 처형 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다시 조말생을 불러 중용하게 됩니다. 조말생은 이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째거나 조말생은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입니다. 드라마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조말생뇌물사건
조선시대 최대의 사기사건은 세종 때의 김도련(金道練)이 꾸민 노비조작 사건입니다.
김도련의 할아버지 김원룡(金元龍)은 친구 김생(金生)과 함께 일찌기 함경도(당시 함길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김도련의 대에 이르러 중앙 정게에 진출했고, 할아버지의 친구인 김생은 그 지방에서 계속 농사를 지었는데 일이 잘 되어 엄청난 논밭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가진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도련은 문서 하나를 조작하여 엄청난 재부를 모으는 희한한 생각을 짜냈습니다. 즉 자기 조부의 친구인 김생을 자기 조부의 노비였는데 함길도로 달아난 것으로 서류를 조작한 것입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므로 자기 할아버지의 노비면 그 후손과 후손의 노비들은 저절로 자기의 노비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전재산과 함께 노비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던 시대에 천 명이 넘는 노비라는 엄청난 재산이 굴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김도련은 노비문서를 조작하는데 성공하여 양민인 김생의 후손 426명을 통짜로 노비로 만들었고, 그들의 전재산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모두 집어삼킨 것입니다. 이 성공을 확실히 굳히기 위해 정계 여기저기에 뇌물을 바쳤는데 뇌물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노비였습니다.
좌의정 이원은 4명, 우의정 조연은 15명을 받았고, 곡산 부원군 연사종은 10명을 받았고, 병조 판서 조말생은 36명, 참의 조숭덕은 8명을 받는 등 노비들이 뇌물로 쓰였습니다. 그밖에 우의정 정탁·평성 부원군 조견·공조 참의 조숭덕은 사건이 밝혀진 세종8년에는 이미 죽었으므로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당시 화폐로 7백 80관(貫)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시세로 적어도 10억대는 되지 않을까요.... 노비는 무척 값이 높은 재산이었습니다.
사헌부의 조사로 이 일이 밝혀지자 이원은 여산에,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연사종은 강원도에, 조말생은 충청도 회인으로 각각 귀양가고 형조의 수사관 박고와 정랑은 곤장을 맞고 파면, 예조참판 하연·경창부 소윤 이숙치·이조정랑 조극관·판내자시사 김타·첨지통례문사 임인산·호조 정랑 이효례, 지승문원사 황보인·부정 남지·지안산군사 김이공·지의천군사 윤간·정주목사 남궁계등은 파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하여 주범인 김도련은 어떤 처벌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노비 132명만을 압수당했을 뿐이며, 양민이었다가 졸지에 억울하게 노비의 신세가 된 김생의 후손들 역시 풀려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비로 남았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노비임은 물론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99% 성공한 것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전형적인 권력형 사기입니다. 대동강물을 팔았다는 김선달의 사기와는 그 종류가 다른, 아주 악랄한 것입니다.
... 빼앗는 선에서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종은 2년 후인 세종 10년 윤4월에조말생을 사면하여 유배를 풀어주었다. 2년후인 세종 12년 4월, 세종은조말생의 직첩도 돌려줄 것을 명했다. 직첩을 돌려준다는 것은 관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2008-03-15 08:45:00
조말생은 태종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았던 능력있는 관리였습니다. 세종도 그런 조말생의 능력을 인정해 상당히 중용했습니다. 하지만 조말생은 상당히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도련 뇌물 사건이었습니다. 김도련의 뒤를 봐준 인물들 중 조말생이 있었던 것 입니다. 조말생은 당대의 실세였기 때문에 그 여파는 더욱 컸고 결국 귀양을 가게됩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대간들이 처형 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주장들을 물리치고 다시 조말생을 불러 중용하게 됩니다. 조말생은 이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째거나 조말생은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입니다. 드라마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조말생뇌물사건
조선시대 최대의 사기사건은 세종 때의 김도련(金道練)이 꾸민 노비조작 사건입니다.
김도련의 할아버지 김원룡(金元龍)은 친구 김생(金生)과 함께 일찌기 함경도(당시 함길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김도련의 대에 이르러 중앙 정게에 진출했고, 할아버지의 친구인 김생은 그 지방에서 계속 농사를 지었는데 일이 잘 되어 엄청난 논밭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가진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도련은 문서 하나를 조작하여 엄청난 재부를 모으는 희한한 생각을 짜냈습니다. 즉 자기 조부의 친구인 김생을 자기 조부의 노비였는데 함길도로 달아난 것으로 서류를 조작한 것입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므로 자기 할아버지의 노비면 그 후손과 후손의 노비들은 저절로 자기의 노비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전재산과 함께 노비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던 시대에 천 명이 넘는 노비라는 엄청난 재산이 굴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김도련은 노비문서를 조작하는데 성공하여 양민인 김생의 후손 426명을 통짜로 노비로 만들었고, 그들의 전재산과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모두 집어삼킨 것입니다. 이 성공을 확실히 굳히기 위해 정계 여기저기에 뇌물을 바쳤는데 뇌물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노비였습니다.
좌의정 이원은 4명, 우의정 조연은 15명을 받았고, 곡산 부원군 연사종은 10명을 받았고, 병조 판서 조말생은 36명, 참의 조숭덕은 8명을 받는 등 노비들이 뇌물로 쓰였습니다. 그밖에 우의정 정탁·평성 부원군 조견·공조 참의 조숭덕은 사건이 밝혀진 세종8년에는 이미 죽었으므로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당시 화폐로 7백 80관(貫)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시세로 적어도 10억대는 되지 않을까요.... 노비는 무척 값이 높은 재산이었습니다.
사헌부의 조사로 이 일이 밝혀지자 이원은 여산에,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연사종은 강원도에, 조말생은 충청도 회인으로 각각 귀양가고 형조의 수사관 박고와 정랑은 곤장을 맞고 파면, 예조참판 하연·경창부 소윤 이숙치·이조정랑 조극관·판내자시사 김타·첨지통례문사 임인산·호조 정랑 이효례, 지승문원사 황보인·부정 남지·지안산군사 김이공·지의천군사 윤간·정주목사 남궁계등은 파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하여 주범인 김도련은 어떤 처벌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노비 132명만을 압수당했을 뿐이며, 양민이었다가 졸지에 억울하게 노비의 신세가 된 김생의 후손들 역시 풀려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비로 남았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노비임은 물론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99% 성공한 것입니다.
김도련의 노비 사기는 전형적인 권력형 사기입니다. 대동강물을 팔았다는 김선달의 사기와는 그 종류가 다른, 아주 악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요즘의 정치·사회현상과 비교해도 충분히 음미할만 한 사건입니다. 요즘도 이런 일이 있지요?
출처 : 세종실록
팀워크 살리는 리더십 엠파스 | 2008.05.04
... 반대했다. 반면 조말생은 궁중 재물을 관장하는 상의원에 장영실이 적임자라고 찬성했다. 마지막에 황희가 나섰다. "용맹이 출중한 관노 김인을 무관으로 발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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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 한 말이다. 황희를 신임하고 시종 중책을 맡긴 세종도 보통 임금은 아니었다. 국왕의 정책노선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비판해오는 황희의 조언을 세종은 최대한 수용하곤 했다. 조말생이나 하륜과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