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08. 7. 19. 22:43
최근 드라마 [대왕세종] 가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 계승권이 충녕에게 넘어가면서 권력 구도가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 조선조 4대 임금으로 조선 최고의 '성군' 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 당했던 첫째 아들 '양녕대군' 은 어떻게 됐을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형과 본의 아니게 빼앗을 수 밖에 없었던 동생 사이에는 조금의 갈등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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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서는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세자가 태종의 마음이 충녕 대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광증' 을 보여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자에게 '광증' 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고, 태종 역시 그런 아들을 탐탁치 않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태종에게 있어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고 결국 일종의 탄핵 처분을 통해 세자를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녕대군' 이고, '세종대왕' 이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원자이자 세자의 위치에 줄곧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양녕대군' 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가 양녕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부터인데 양녕의 뜻이 사양할 양 (讓), 편안할 녕(寧) 즉, "(세자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편안하다." 는 뜻임을 살펴 볼 때 '양녕대군' 이라는 호칭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칭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는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 했을지언정 '편안' 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폐위' 된 세자의 앞날이 가시밭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광증에 시달리면서 전국을 전전해야 했고, 아버지 태종의 시퍼런 서슬에 질려 왕실의 '맏어른' 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주변의 감시와 관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성군' 세종의 형이 걸을 수 밖에 없는 잿빛 운명이었다.


양녕대군의 운명은 성군으로서 찬란한 영광의 길을 걸었던 세종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동생의 '조선' 을 밝게 빛냈다.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 되며 모든 것이 부정되어 버린 상황에서 그에게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양녕대군에게는 왕실 종친으로서의 '권위' 도 '명예'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아가는 것', 그 뿐이었다.


이렇듯 상왕인 아버지와 임금인 동생을 둔 '조선' 이라는 나라에서 양녕대군은 홀로 희대의 불운아로 전락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산 양녕대군이 불운의 원인 제공자인 세종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비록 그와 세종의 우애가 깊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구도' 재편 과정에서 파생된 희생자와 쟁취자로 구분 지어졌다. 그것이 우애 깊은 형제가 겪어버린 권력의 비정함이라면 비정함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형' 으로 각별하게 모셨지만 단 한번도 '왕실의 어른' 으로 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행을 일삼았던 양녕에게도 원인이 있었지만 한 때 권력의 중심부였던 그를 견제하는 왕실, 조정 세력과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세종의 영향도 있었다. 세종에게 양녕대군은 언제나 보살펴 드려야 하는 형님이었지 왕실의 대표하는 종친은 아니었다. 이것이 또한 양녕대군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세종의 죽음' 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문종이 오래지 않아 승하하고 12살 어린 임금인 단종이 즉위했을 때, 양녕대군은 비로소 자신의 '복권' 을 희망할 수 있게 됐다. 태종도, 세종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왕실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 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양녕대군의 움직임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인물로 어린 임금 단종이 아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점찍었다. 양녕대군은 수양에게서 젊은 시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좌절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로 밀기 시작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 된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과정 속에서 양녕대군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양녕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영의정' 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즉위' 할 것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종친들, 특히 수양대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안평대군의 사살에 동조했고 더 나아가 세종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단종의 제거에도 앞장 섰다.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세종이 무릎에 올려 놓고 성삼문과 신숙주 등에게 친히 "내가 죽더라도 잘 부탁한다." 며 어여뻐 했던 단종은 불과 10여년의 세월 만에 '큰 할아버지' 양녕대군의 '공세' 속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단종을 폐위시키고 영월에서 죽이고 만 것은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신숙주였지만 뒷배경에는 그 모든 것에 침묵했던 왕실 종친과 그를 위시한 양녕대군이 존재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한 금성대군, 혜빈 양씨와 같은 왕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세종의 세 아들과 손자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회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묵묵히 뒷배를 봐주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 양녕대군은 큰아버지의 이상의 존재였고 비로소 양녕대군은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권위와 존경을 회복했다. 세자였던 형의 자리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던 형의 운명은 40여년 만에 그 후손들의 '죽음' 을 제물로 제자리를 찾게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과 그의 형 '양녕대군' 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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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홀더채택으로 귀차니스트에게딱~~~!!  이런 책갈피 봤어??

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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