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활동 중단, 도미한 이지연 13년만에 입 열다
1980년대말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바람에 멈추어다오’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일약 청춘스타로 떠올랐던 가수 이지연(36)씨.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어느날,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행을 택했던 그가 13년 만에 당시 상황과 심경을 밝혔다.
이지연씨는 최근 여성조선 10월호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 당시 도망치듯 미국행을 택했던 이유에 대해 “남편과 결혼을 반대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며 “어린 마음에 몇 달 지내다 보면 금방 해결되리라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씨의 부모님들은 10살 연상의 이혼남이었던 현재의 남편 정국진(47)씨와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도망치듯 미국에 건너간 두 사람은 정씨의 큰형 내외만 지켜보는 가운데 1990년 10월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이씨의 부모님들도 정씨를 사위로 받아들였다. 이씨는 “결국 해결은 되었지만 부모님께 큰 죄를 지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부모님이 많이 늙으셨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그러나 이씨의 미국행이 단지 사랑을 위한 도피만은 아니었다. 그는 “남편을 만날 즈음 바쁜 스케줄과 악성 루머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며 “심하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대에 서면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연예계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때 ‘히파이브’의 싱어로 같은 클럽에서 일하던 남편을 알게 됐고, 남편의 따뜻함에 많이 의지하게 됐다”고 여성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여성조선은 “이씨는 현재 미국 동부 애틀랜타에서 남편과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다”며 “남편 정씨는 은행대출을 도와주는 융자전문가로 활동하며 퓨전 스타일 스시바를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씨는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과 신앙 덕분에 10년 넘게 시달렸던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10년 넘도록 나를 괴롭히던 루머들과 혼자 싸우며 힘들어 하다가 신앙을 가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나를 괴롭히던 그런 것조차 포용할 수 있게 됐다”며 “내 신경질 받아주느라 남편이 고생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가수 복귀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씨는 “예전부터 늘 베스트 앨범에 대한 욕심은 있었다”며 “제 음반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인터넷 음원에도 등록된 게 없어서 사실상 제 노래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고 여성조선은 전했다.
최근 영화 ‘어린신부’에서 문근영이 ‘난 사랑을 아직 몰라’를 부르고, 가수 장나라가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리메이크하는 등 자신의 노래가 다시 불리는 것에 대해 이씨는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심경을 밝혔다.
이씨는 “굳이 복귀가 아니더라도 무대에는 한번쯤 다시 서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번 인터뷰가 복귀 인터뷰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당부도 전했다고 여성조선은 덧붙였다. 여성조선은 “이지연씨는 서른 여섯 중년의 주부가 됐지만 갸름한 계란형 얼굴과 긴 생머리의 미모는 예전 그대로였다”고 전했다.
인터뷰 기사 전문은 시중에 판매중인 여성조선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닷컴 internews@chosun.com
입력 : 2005.09.26 16:05 27'
아래는 펌글입니다.
![](http://pds2.egloos.com/pds/1/200511/18/91/a0007191_020472.jpg)
혜은이는 당대의 최고 스타였어요. 혜은이가 여성스러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황홀해했고, 그녀의 하얀 피부에 다소곳이 박혀있는 검은 눈동자가 브라운관을 통해 쳐다보면 반하지 않을수 없었다네요.
당대 최고 가창력의 가수 이은하는 항상 혜은이를 부러워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이은하를 이야기할 때면 아름다운, 미모의 이러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경우가 드물었거든요. 둘은 반드시 비교되고, 가창력의 이은하, 미모의 혜은이로 부르면서, 아무도 이은하의 미모를 칭찬하지 않는 것이지요.
16세때 연예계에 데뷔한 이은하는 매우 바쁜 스케쥴의 연예인 생활을 했고,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서 제대로 이성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군요. 당시는 남녀공학 따위는 없었고 여고를 나왔고, 또한 대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었으니 요즘 젊은이처럼 캠퍼스커플이니, 손잡고 데이트를 한다거나 한 적이 없을 것이고, 매스컴에서도 여성성으로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은하가 첫 데뷔 녹화에는 재밋는 일화가 있습니다. 담당 PD가 이은하의 얼굴이 방송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편집되었었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은하는 충격을 받습니다. 후에 최초로 이은하가 챠트 1위를 차지한 곡도, 1위를 차지하기 전까지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라디오에만 출연해서 1위로 밀어올린 것이랍니다.
1979년 혜은이는 10대가수상, 이은하는 '밤차'로 최우수가요상을 받습니다.
파워풀한 펑키로 변신해서 성공한 뒤에, 그녀는 재변신을 시도한 시기는 마침 록밴드 붐이 불고 있었고, 현철과 불나비, 처럼 백밴드를 데리고 록풍의 노래가 도입될 때였습니다. 이은하는 <이은하와 호랑이들>이라는 현철에 맞먹는 유치찬란한 이름으로 헤드밴드를 차고 호피무늬에 신곡 활동을 했습니다.
![](http://pds1.egloos.com/pds/1/200511/18/91/a0007191_0493965.jpg)
아뿔싸, 젊은 테리우스가 그녀에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처음으로 여자로 보아주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이은하의 백밴드 '호랑이들'의 기타리스트와 사랑에 빠진 이은하는 생애 최초로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연예인의 특성상 개인생활도 없었기 때문에, 둘이 따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도 못했다는군요. 게다가 어머니가 무척이나 깐깐하게 일정을 관리했다고 해요.
드디어 몰래한 사랑은 깊어만 가고, 도끼 썪는줄 몰랐던 모양. 결국은 어머니에게 들통이 났던 모양입니다. (겁도 없이 어머니에게 결혼시켜달라고 찾아갔던 것이었던지도 모릅니다.) 기타 청년은 이은하의 어머니 앞에서 무릎꿇고 모질게 모욕을 당하고, 이은하도 대판 혼났었나봅니다.
그리고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그 해 최고의 히트곡이 됩니다. 챠트에서 1위를 차지해 이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을 유독 많이 흘렸습니다.
그녀가 언젠가 아침 토크쇼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이야기를 언뜻 비추면서 눈이 그윽해지더군요. 이은하는 아직도 미혼입니다.
이쯤해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들어봅시다.
예전 백두산 모습....
예전의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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