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08. 7. 13. 15:42

오는 6월 25일은 한국전쟁 58주년이 되는해다.


한국전쟁하면 떠오르는게 뭘까?

UN깃발아래 세계최초의 다국적군 부대가 편성된 전쟁?

세계최초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진영간의 국운을 건 전쟁?

민족의 비극?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전쟁은 개전부터 종전...아니, 휴전에 이르기까지 seesaw(시소)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한 전쟁, 그 자체였다.


특히 많이들 들어봤을 인천상륙작전, 백마고지 전투, 흥남철수 및 작은 승리 하나가 대한민국을 살리는 계기가 된 전투(예:청성부대 포병대대)등

무수히 많은 일화가 있다.

하지만 전쟁인 이상 국군이 패한 전투또한 무수히 많았고 특히 국군 역사상 치욕의 전투..아니, 도주라 칭해지는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현리전투'가 그것이다.


6.25를 맞이하야 한국전쟁관련 포스팅을 하고 싶었고 빛나는 승리의 장을 장식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의미가 있겠다 싶어 이리 끄적거리

게 되었다.

(도라도라도라 와 진주만 관련글 이후로 그런 종류의 포스팅이 꽤 큰 일이라는걸 진지하게 알아버려서 걍 간단히 쓸테다..-_-)


치열했던 seesaw 전쟁


때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게 된 국군과 UN군의 재반격으로 전선은 다시 북상하여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

중공군은 다시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미군의 방어는 매우 견고하였고 중공군은 그

전략적 의지를 관철시키기가 블가능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중공군은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중동부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이었다.


당시 국군은 전쟁 초반 낙동강 까지 밀리며 많은 전력이 소모된 상태였고 징집된 병사들 또한 거듭된 북진으로 인해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인원이 대부분

이었으며 또 다시 밀리게 되자 그 조차도 속절없이 소모된 상태였다.

이를 알고있던 중공군은 국군을 목표로 하여 중부 전선을 장악한 후 수도권을 대포위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여 5월 공세 를 개시한다.

그리고 이 5월 대공세에서 중공군이 목표로 정한 국군 부대는 바로 ....

 

그 유명한 백골과 백마. 이 두사단이 주력인 국군 제3군단 이었다.


1951년 중반 중부 전선의 병력 배치는 강원도 인제를 중심으로 좌익엔 미10군단이, 우익엔 국군3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험준한 지형의 특성한 그 경계를 정확히 설정하고 병력을 배치하기가 애매모호한 실정이었다.

 

당시 미군과 국군의 경계 남쪽 끝자락에는 국군의 유일한 보급로 거점인 오마치 고개(현:오미재 고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오마치 고개를 두고 미군과 국

군의 작은 의견차이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3군단의 입장에선 이 오마치 고개는 중요 거점이었기 떄문에 당연히 방어 병력을 주둔시키려 하지만 그 위치가 미 10군단 관할이었다는 이유로 10군단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병력을 철수시키게 된다. 문제는 이 후에 발생하는데 미10군단은 이 지역을 그대로 무주공산으로 방치해 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1951년 5월 15일.

마침내 중공군은 21개사단 , 약 30만의 병력으로 대공세를 개시하고 그 일부 병력은 미10군단과 국군3군단 사이를 파고든다.

미10군단 예하의 국군 5사단과 7사단을 격파하여 10군단의 우익 즉, 3군단의 좌익을 파고든 중공군은 하룻밤새 30km를 파고들어 이 오마치고개를 점령한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이 오마치고 고개의 중요도는 중공군도 알지 못했고 단지 1개 중대병력이 고개를 점령했다고 한다.)


10군단의 우익인 5사단과 7사단을 급속하게 뜷고 들어온 중공군은 3군단의 후방겪인 오마치를 점령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군3군단을 현리에서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3군단은 군단장, 예하 사단장 할것없이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모든 중화기와 장비들을 내팽개치고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태백산

맥 넘어 3군단의 우익인 동부전선의 국군1군단 역시 전선의 단절과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동반 후퇴를 하게 되고 ...





순식간에 연합군의 전선에 '측면'이 발생하게 된다.



포위당한 병력이 전멸을 피하기 위해 후퇴하는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현리전투가 치욕적인 이유는 후퇴의 시점과 후퇴의 모습이

퇴각이 아닌 미군 전사기록을 빌려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나살기 경쟁의 도주'였기 떄문이다.

작전상 후퇴와 도주식 붕괴는 엄연히 다르다.

오마치를 점령당해 측면 공격을 당하자 군단은 전황을 파악하려 하지도 않고( 반 포위 상황) 이미 사방에 포위되었다고 겁부터 먹고 군단장은 연락기를 타고 도주. 고급 지휘관은 계급장 때어 버리고 도주. 병사들은  장비를 버려둔채 도주한다.

 당시 이들이 도주한 거리는 종 70여km로 북한 남침시 서울까지 평지에 가까운 50km가 4일에 뚫렸다는걸 상기해 봐도 너무나 비참한 후퇴였으며, 같은 시각 중국의 공세를 막던 영연방군은 가평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공세를 격퇴한것과 비교해 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후퇴였다. 


전선이 급박하게 밀리자 당시 미8군 사령관은 전략 예비대인 미3사단과 187공수여단을 긴급투입하여 돌파된 전선을 메꾸게 하고 국군 1군단예하 1연대로 하여금 대관령지역을 선점시켜 가까스로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

이 후 반격에 들어간 미3사단이 적의 측후방을 공격하자 중공군은 급속히 붕괴되고  다시금 전선은 회복된다.  


가까스로 전황을 수습시킨 미8군 사령관(밴 플리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국군3군단을 즉시 해체시키고 그때까지만 해도 국군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육본을 거쳐 지휘하던 관행을 깨고 국군1군단등 한국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다.


벤 플리트가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 라고 질문하자, 이에 유재흥 3구단장은 " 잘 모르겠습니다. " 라고 대답한다.

"당신의 예하 2개 사단은 어디 있소 ?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 라고 다그쳤고 이에 " 그런 것 같습니다. " 라고 유재흥이 대답하자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 "  라고 밴 플리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 기록되어있다. (한국전쟁사)

 

후에 백골과 백마는 정예사단으로 다시 태어나 큰 전공을 올려 치욕을 만회하고도 남는 전공을 세우지만  아둔한 지휘관과 군기빠진 군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게 현리전투라 하겠다.




출처
http://cafe.daum.net/hanryulove/KTsc/13556?docid=5sb4|KTsc|13556|20080627164122&q=%C7%F6%B8%AE%C0%FC%C5%F5&srchid=CCB5sb4|KTsc|13556|2008062716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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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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