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민상 스포츠감독 정보 더보기
- 출생 : 1956년 5월 5일
- 소속 : 대한수영연맹
- 수상 : 2007년 제12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상
- 경력 :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팀 감독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수영 국가대표팀 감독
- 2001년 윈앤윈 수영클럽 운영
박태환을 만든 사람들 - 노민상 감독
“돌아온 박태환에 술 끊겠다 약속했다”기사입력 2008-08-10 12:27 연합뉴스
박태환의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쾌거 뒤에는 박 선수를 이끌어준 숨은 공로자가 많다.
그중에서도 노민상 감독은 박태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다.
지난 2월27일 저녁 한국 수영대표팀의 전지훈련 장소인 말레이시아 샤알람의 숙소.
노민상 대표팀 총감독은 1년2개월 만에 자신의 품에 돌아온 애제자 박태환(19.단국대)과 마주앉았다.
2008 베이징올림픽까지 5개월 정도 남은 상황에서 금메달을 위한 훈련 계획을 설명하고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내는 자리였다.
박태환의 각오를 들은 노 감독은 자신도 제자와 약속을 했다. 술을 딱 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수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다친 노 감독은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을 술 한잔으로 달래고 있었지만 이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빡빡하게 짜낸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을 하는 박태환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노 감독의 고난도 만만치 않았다.
박태환이 헤엄을 치는 동안은 한 번도 쉬지 않고 50m 수영장 양끝을 왔다갔다하며 구간별 기록을 체크했고, 숙소에 들어가서는 이를 일지로 옮겨 적는데 시간을 보냈다. 일지 작성 뿐만 아니라 라이벌의 수영 장면을 영상으로 보며 레이스 전략을 짜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56년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난 노민상 감독은 어릴 적부터 한강에서 헤엄을 치며 수영 선수로서 꿈을 키웠다. 수영 명문인 오산중에 입학했고 오산고까지 진학했지만 선수로서 빛을 보지 못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강원도 원주에서 행정병으로 입대해 1980년 제대한 노민상 감독은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고 당시 코치로 유명했던 강겸일씨의 수영 클럽에서 코치로 일하며 코칭 수업을 받았다.
반포 반원초교 코치로도 잠깐 있었던 노 감독은 1983년 강남구 대치동 무궁화스포츠센터에 취직했다. 주임부터 시작해 부장까지 승진하면서 자신의 클럽을 만들었고 성실한 지도 능력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박태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노 감독은 1996년 초로 기억한다.
"수영장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그마한 8살 짜리 꼬마가 음료수 캔을 두 손에 꼭 쥐고 내 앞으로 오는 게 아니겠어요. '너 누구냐'라고 물었더니 '수영하러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물 속에 집어넣어 보니 곧잘 수영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박태환이 될 줄 몰랐습니다"
소년체전부터 전국체전까지 노 감독은 박태환과 함께 숱하게 우승을 맛봤고, 결국 제자를 2004년 아테네올림픽 최연소 대표선수로 만들어냈지만 부정출발로 실격됐을 때는 박태환 아버지 박인호(58) 씨와 포장마차에서 마주앉아 소주 잔을 기울이며 아픔을 달래기도 했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6년 8월 캐나다에서 열린 범태평양수영대회 직전이었다. 고교 중퇴 학력의 소유자가 수영대표팀 감독을 맡은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현장 경험에서 얻어진 노 감독의 지도력은 아무리 '가방끈'이 긴 코치들을 이미 뛰어넘어 있었다.
하지만 경험만으로 선수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태릉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한 송홍선 체육과학연구원 박사를 만난 뒤로 노민상 감독은 생리학의 신봉자가 됐다. 그는 "생리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훈련에 대한 기록도 빠트리지 않는다. 훈련이 끝나고 선수들이 쉴 동안 A4용지에 그날 훈련 기록을 빠짐없이 수기로 적는다. 행정병으로 근무했던터라 글씨는 컴퓨터로 작성해 인쇄한 것보다 더 깔끔하다. 이렇게 작성된 박태환의 훈련 일지는 수천장을 넘는다. 노 감독은 "수영의 미래를 위해 기록을 하고 있다. 박태환의 훈련 일지는 향후 수영 꿈나무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말 도하아시안게임에서 1차 목표를 이룬 노 감독은 박태환이 개인훈련을 하겠다며 자신을 떠날 때도 "내 품으로 다시 오게 돼 있다"라고 여유를 보였고 결국 1년 2개월 만에 제자가 돌아오자 남은 24주 동안 훈련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박태환은 내 인생의 전부"라며 금주를 선언한 감독과 모든 것을 잊고 훈련 집중을 다짐한 선수는 결국 10일 오전 2008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환희의 순간을 만끽했다.
연합뉴스
노민상 감독은 이날 오후 4시45분쯤 태릉선수촌 수영훈련장에서 선배인 김봉조 경기력향상위원장(60)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인근 태릉 성심병원에 입원했다. 왼쪽 광대뼈 부위를 다치고 입안이 찢어진데다, 골반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노민상 감독은 119에 신고를 했다.
노 감독은 기자에게 "이날 오후 선수들에게 무산소운동을 시키고 있던 중 김 위원장이 수영계 후배와 함께 찾아와 코치실로 갔는데 거기서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면서 "김 위원장이 '네가 박태환의 코치 교체 와중에 제3자 개입을 얘기했냐'고 말하며 박치기를 하고 벽에 밀쳐 넘어뜨린 후 30분간 구둣발로 짓밟고 찼다"고 분개했다. 옷이 찢어질 정도로 폭행을 당한 노 감독은 김 위원장의 후배가 말리는 틈에 도망쳐 119에 신고했다.
노 감독은 "선수들이 운동하는 태릉선수촌에서 근처에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폭행당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다"면서 "내일 고소장을 접수시키겠다"고 말했다.
스포츠 조선 기사 내용..
아래의 기사는 노컷뉴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노민상(51) 대한수영연맹 경영 국가대표팀 감독이
1일 김봉조(60) 수영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병원에 입원한 것에 대해 노감독과 김위원장이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김봉조 위원장은 2일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의자에 앉히는 과정에서 허리를 잡아 앉게 만든 것은 있지만
전혀 폭행한 사실은 없다"며
"오히려 노감독이 혼자 뒤로 넘어지는등 자해극을 벌였다"고 입장을 밝혔다.
한편 노민상 감독은 "김봉조 위원장이 후배와 함께
'제3자 이야기를 운운하며 구둣발로 꼬리뼈 부분을 밟는등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노감독은 진단서가 나오는 대로 결과를 본 뒤 김봉조 위원장을 고소할 방침이며
김위원장 역시 "경찰 조사하면 사실이 명백히 가려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이는 법정공방으로 번질 것으로 보인다.
김봉조 위원장과 노민상 감독은 모두 박태환의 옛 스승이다.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박태환을 국가대표팀에 발탁한 것이 바로 김봉조위원장이다.
당시 김위원장은 수영대표팀 감독직을 맡았고 노민상 감독이 코치였다.
노민상 감독은 2006 도하아시안게임까지 지난 10년간 박태환을 지도해왔다.
박태환의 두 스승이 이렇듯 폭행여부 공방을 벌이게 된 배경에는
최근 박태환이 태릉선수촌을 떠나 개인훈련을 하기로 한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박태환이 노민상 감독의 품을 떠나 새롭게 개인코치를 두고
전담반을 꾸린 것에 대해서 수영계는 사실상 박태환이 김봉조위원장과
새롭게 인연을 맺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지난 달 초 노민상 감독은 "박태환과의 결별에 제3자가 개입되어 있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고 노감독이 지칭한 제 3자가 김봉조 위원장이라는 것.
결국 박태환의 두 스승은 이와 관련해 폭행공방까지 벌이게 돼
노감독이 당시 제기했던 '제3자 개입설'이 다시한번 논란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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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도라는 수영복 회사에서 스폰서 즉 , 돈을 많이 준다고 하니까 이런 저런 사연이 겹쳐서 일어난일??
그러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면 말장도루묵신세가 될 것이니까
다시 노민상감독에게 돌아온거고
결국 금메달을 딴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