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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9 박포.........
  2. 2008.07.05 소공동의 유래

박포.........

2008.07.19 22:26 from 분류없음


황희의 집은 북촌에 있었다죠....

그의 유적은 파주에 있고,,,

황희가 파주에 정착한 이유는 과거에 급제하고 이쪽에 관리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난 후,, 파주 반구정에서 살았다고,,,

죽산현은 지금의 안성 그 일대인 듯 보입니다,,,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박포는 '제 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오히려 이사실을 알게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제 2차 왕자의 난'이 끝난후 방간의 배후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수됩니다. 이때 박포의 아내는 도망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를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 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방간이 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박포는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당했다.

이로써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방원의 세자 책립은 결정된 셈이었다. 난이 평정된 뒤 방원의 심복 신하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관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추진하던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제도 개혁의 결과 사병이 혁파되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립되었다. 또한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 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

≪참고문헌≫ 定宗實錄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朝鮮王朝의 政治·經濟基盤(韓永愚,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8)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방간의 편에 섰다 태종에게 참수 당한 박포의 처는 죽산현에 살면서 자신의 종과 간통하지만 이를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자 그를 죽여 연못에 빠트린다.

하지만 연못에 빠트렸던 우두머리 종의 시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된 채 사람들에게 발견되자 자신의 과오가 들어날까 두려워진 박포의 처는 서울로 도망하여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다.
 
이 때 황희가 박포의 처와 사통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이 추문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만큼 황희를 여러모로 난처하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청주목 / 죽산현 : 조선 초에 죽산은 충청도에 속했다.
◎ 죽산현(竹山縣)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죽주(竹州)로 고치었다.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 단련사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 임내에 붙이었다.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죽산 현감(竹山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음평(陰平)【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또는 연창(延昌)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경기(京畿) 양지(陽智)에 이르기 16리, 서쪽으로 안성(安城)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진천(鎭川)에 이르기 21리, 북쪽으로 양지(陽智)에 이르기 36리이다.
호수는 4백 70호, 인구가 2천 1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8명이요, 선군이 1백 35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박(朴)·최(崔)·안(安)·양(梁)·이(李)·유(庾)·민(閔)·김(金)·음(陰)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기후는 차다. 간전(墾田)이 5천 7백 89결이요,【논이 9분의 4가 된다.】 토의(土宜)는 기장·벼·콩·조·팥·메밀·참깨·밀이다. 토공(土貢)은 대추·칠(漆)·족제비털·잡깃[雜羽]·종이·삵괭이가죽[狸皮]이요, 약재(藥材)는 인삼이다.
역(驛)이 2이니, 분행(分行)·좌찬(佐贊)이요,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북쪽 건지산(巾之山)이다. 일명(一名) 검단산(劎斷山)이라 한다.【동쪽으로 충주(忠州) 망이성(望伊城)에, 서쪽으로 용인(龍仁) 석성(石城)에 응한다.】
【원전】 5 집 628 면





파주 황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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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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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의 유래

2008.07.05 12:32 from 분류없음
태종이 둘째딸 경정공주를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출가시키면서 아담한 집을 지어주었다.

이 집이 작은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으로 불려지면서

그 마을이름도 소공주동 - 소공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소공동]은 北倉洞, 太平路2街, 南大門路 2街,3街,4街, 西小門 洞, 貞洞.巡和洞 義州路1街 忠正路 1街, 小公洞등 11개 法定洞과 봉래동1가의 일부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 명칭이다

[소공동의 동명]조선태종의 둘째딸인 慶貞公主의 궁이 있었으므로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곳을 한자로 소공주동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소공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북창동은 조선시대 관아인 선혜청의 북쪽창고가 있는데서 붙여졌으며, 서소문동은 서울성곽 8문의 하나인 서소문에서 유래되었고 덕수궁 북서쪽에 위치한 정동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능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는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의주로변 이화여고와 중앙일보사가 자리한 곳에 위치한 순화동은 광복후에 순청동의 「巡」자와 화천정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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