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8.21 줄기차다는 느낌의 조갑제
  2. 2009.05.27 변희재와 지만원, 진중권은 누구?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자세

정말 대차군요




잘잘못을 떠나서

요즘같이

좋은게 좋다는

두리뭉실한 세상에서

독야청정하다고나 할까



약간 마음에 드는데요




칼을 빼 들었으면 썩은 무우라도 자른다고

다 없애버리겠다는 전투적인 자세



전두환 전대통령 시대의 장세동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이미지동영상
  • 조갑제칼럼니스트
  • 출생1945년 10월 24일
  • 출생지일본
  • 학력부산고등학교
  • 수상제12회 관훈언론상(1994) 제4회 일본 마이니치 신문 주최 아시아 태평양상(1992)
  • 경력월간조선 편집위원(2005) 월간조선 편집장 겸 대표이사(2001) 관훈클럽 편집위원(1994)
  • 커뮤니티조갑제닷검
  • 추천컨텐츠야후 인터뷰 - 보수논객 조갑제, 보수의 칼을 뽑다









서경석 목사 “조갑제 발언, 정말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

동아일보 - ‎3 시간 전‎
보수단체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인 서경석 목사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거부운동을 벌이자는 보수논객 조갑제 씨(전 월간조선 대표)의 주장에 대해 "말이 ...







조갑제 “DJ 국장 반대…배신자 이명박 응징”

동아일보 - ‎20 시간 전‎
보수논객 조갑제 씨(전 월간조선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국장 결정은 이 ...









조갑제(趙甲濟, 1945년 10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경영인이다. 조선일보 월간조선 편집장, 월간조선사 사장 등을 지냈다.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출생했다. 부산에서 성장했고,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수산대학을 중퇴했다. [1]

1945년 10월 24일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946년 부모를 따라 고향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으로 돌아왔다. 그 후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고등학교에 졸업한 그는 고교 재학 시절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방송에 탐닉했다. 시장에서 구한 단파라디오로 하루 4~6시간씩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를 들으며 영어와 일어를 익혔다. 그의 외국어 능력은 기자 생활 당시 취재 영역을 넓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 부산수산대학에 입학하였지만 군 복무 후 복학을 포기하게 된다.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의 입사(入社)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1] 1974년 중금속 오염 실태를 취재해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로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다.[2]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1] 특히 이 광주 민주화 운동 취재는 1985년 양대 월간지에 보도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이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3]

1981년 상경하여 월간 마당에 창간 멤버로 입사했고 르포 기사 분야에서 일했다. 당시 그의 대표적인 기사가 ‘부산 김근하(金根夏)군 유괴 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기사였다. 마당의 2대 편집장을 지낸 후 1983년부터 월간조선에서 일했다. 주로 탐사보도 방면에서 활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10·26사태와 박정희의 죽음에 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된다. 그가 박정희 연구에 평생 매달리게 된 것도 10·26 취재가 그의 정치적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조국 근대화’ 논리에 깊이 천착하고 이에 경도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해 반대하다가, 지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87년 6월에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나서기도 했다.[4] 1991년부터 월간조선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북조선 체제와 대북화해 정책을 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고, 박정희 재평가에 힘써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전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의 독립 법인화에 따라 편집장 겸 대표이사로 재임했으나, 2004년에는 편집장, 2005년에는 대표이사 자리에서 각각 물러났다. 이후 1999년부터 운영해온 개인 홈페이지와 출판사 조갑제닷컴으로 활동 영역을 옮겨, 이 두 매체를 통해 전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현재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시국관과 이념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치 평론 사이트 조갑제닷컴에 자신과 우파 인사, 독자들의 글을 선별해서 칼럼 형식으로 싣고 있다.



기자가 된 직후인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를 해보곤 유신 내내 단 한 번도 대통령선거를 해보지 못했다. 유신이 선포됐던 1970년대의 박정희는 너무 강했기에 젊은 우리들은 심정적으로도 그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해직까지 됐으니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조갑제도 박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3공 비화를 추적하면서 박정희는 일본의 일류교육, 미국의 장교교육을 받은 실용적인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갑제는 ‘마당’에 있을 때 이미 박정희의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때 우리는 독자가 박정희 시대의 비화를 밝히는 것은 좋아하지만, ‘박정희는 여자를 좋아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면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다.[3]







연표

  • 1962년 부산중학교 졸업
  • 1965년 부산고등학교 졸업
  • 1967년 부산수산대학 중퇴
  • 1971년 부산 국제신보 입사
  • 1981년 월간 마당 편집장-취재부장
  • 1983년 조선일보 월간조선 기자
  • 1991년~2000년 12월 31일 월간조선 출판국 편집장
  • 1997년 하버드 대학 니먼 펠로우 1년 연수
  • 2001년 1월 3일 조선일보의 독립법인화에 따라 편집장 겸 대표이사에 취임
  • 2005년 4월 1일 조갑제닷컴 대표






정치·사회에 관한 견해

[편집]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

언론에서 조갑제는 민주화 운동 자체를 좌익이라고 비판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4·19 혁명, 6·3 사태,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항쟁을 근본적으로 반공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하며, 이 운동 속에 소수의 좌익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세를 이루지 못했고 주도권도 잡지 못했다고 주장한다.[5]

[편집] 광우병 논란에서의 입장

뉴라이트가 주최한 광우병선동센터 KBS, MBC 규탄 기자회견 참여하고, 광우병 쇠고기 파문에 대해서 “MBCKBS의 선동보도에 넘어가면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라고 입장을 밝혔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MBC와 KBS의 선동보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 는 것을 확실히 얘기해줬어야 했다”며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비판했다.[6] 한편, 조갑제닷컴에서는 “광우병이 미국에서 발생해도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대책, 설명 없이 무조건 안전하다 하니 걱정할 수밖에 없다”며 “국민이 걱정하면 바로잡는 게 마땅한 정부의 자세다. 국민이 납득하고 안심할 수 있는 대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

[편집] 단박인터뷰에서의 비평

한국방송 김영선 PD의 단박 인터뷰 2008년 6월 18일에 출연해 자신을 진보 논객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촛불시위는 청소년이 밤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산 쇠고기는 세계에서 가장 최고의 안전한 품질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산소고기 대국민사과에 대해 조갑제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거짓말과 폭력에 항복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빚어졌다고 했다”라고 말했고,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는 “이념이 없는 실용주의 노선을 발표하면서 소신을 밝히지 못해 보수층의 지지가 떨어진 것이다. 또한 초기내각이 실패한 이유는 한반도는 이념 전쟁이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 이념 전쟁터에서 이념을 버리고 그 노선에 맞는 고분고분하고 경험없는 교수 중심의 내각으로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8]




 

[편집] 신라에 대한 견해

문무왕이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라 칭하여 사대모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자 조갑제는 이의를 제기하여 문무왕이 모화사상에 젖어서 족보를 조작하려고 했다면 왜 하필 중국 한족이 싫어하는, 더구나 한나라에 반역했다가 도륙된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겠느냐며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9]

[편집] 연개소문에 대한 입장

2008년 2월 조갑제는 연개소문북한김정일과 비슷하다고 평가하였다. 그 근거로 두 인물 모두 포악하다, 외교에 실패해 당나라미국의 원수가 됐다, 아들들을 잘못 키웠다고 지적하였다.[10] 또한 조갑제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았다.[11] 그를 실패한 역사 인물이라 평가하였으며 그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삐뚤어진 역사관의 발로라고 비판하였다.[10] 조갑제고구려 추앙 분위기 속에서 대체로 과대평가되고 미화되었지 폄하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하였으며, 연개소문 긍정론에 대해 연개소문을 통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닌다며 비판하였다.[11] 조갑제는 또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서강대학교 교수 이종욱(李鍾旭)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포악함은 고구려 백성들의 마음이 왕국을 떠나도록 했다, 집권과정에서 100여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이들은 왕정을 담당하던 세력이었다, 쿠데타에 반대한 지방세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력을 총동원할 수가 없었다. 당과 싸우려면 국내의 단합을 도모해야 했는데 분열을 조장했다, 안시성에서 싸워 이긴 성주는 연개소문에 반대했던 이였다. 그는 연개소문의 도움 없이 당나라군을 무찔렀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며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11]




 

[편집]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그는 박정희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 김영삼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각각 꼽는다. 김영삼은 지금의 좌파를 키워준 좌파의 숙주(宿主)라고 간주했다. 우파이면서 좌파가 활약할 수 있도록 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1] 민주당계 정권을 친북좌파세력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모택동 군대와 싸웠고 비록 만주국 군인이었지만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고 민족정신이 강했다는 증언이 많다”라며 박정희가 친일파가 아님을 주장하기도 했다.‘남북정상회담’이라 하지 않고 ‘노무현-김정일 회담’이라 하기도 했다. [12] [13]


 

[편집] 긍정적 평가

조갑제의 대한 긍정적 평가로는 여타 보수 논객과 달리 민주화 운동을 인정하는 등 유연함을 유지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언론인으로써 다수의 견해에 반대하는 견해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그와 관련된 비리가 전혀 없다는 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다.

[편집] 부정적 평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소위 진보계열 논객들에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진중권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제목을 패러디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통해 그를 ‘극우 파시스트’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항상 극우적으로 치닫아 주화입마에 빠지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B3%80%ED%9D%AC%EC%9E%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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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노이즈마케팅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달리보면

우리사회의 양념같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있어 인터넷도 재미있고 흥미있죠.

이런 사람들이 꺼리낌없이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니까  우리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말의 공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듣는 우리가 취사선택하여 소화하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지만원

이분은 한 때 사회의 시스템화를 주장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그 때는 좋아했었죠.

일례로  모르는 분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은행창구에서의 줄서기가 극성을 부렸었습니다.

공과금 한번 낼려면 하루의 절반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새치기도 빈발했고요.

이것을 해결한 것이 지금은 은행마다 비치하고 있는 순번표입니다.

이러한 은행에서의 새치기같은 국민들의 의식부재가 아닌 시스템이 부족한 부분을 해결하자고 주장한 분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너무 횡설수설하는 것 같습니다.




변희재야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다치고

진중권은 교수라는 어엿한 직업이 있는분이 너무 나대는 느낌입니다.

소속대학에서의 평가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강의는 열심히 하는지?


 



변희재(1974년 -)는 한국인터넷 논객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1994년 입학하였고, 재학시절부터 학내에서 각종 평론활동을 하였다.

1999년 인터넷 언론인 "대자보"를 창간할 때 참여하였고, 한동안 진보적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강준만이 주도하는 정치평론지인 《인물과 사상》에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이후 노무현을 지지하는 논객들의 모인 인터넷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노무현 집권 이후, 2003년 민주당 분당시, 반노무현 성향으로 돌아섰고, 인터넷 언론인 브레이크 뉴스를 창간하여 친 민주당 , 반 노무현 성향의 논조로 활약하였다.

이후 문화방송 및 각종 프로그램에서 문화평론을 하기도 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왔다.

2005년 이후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기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수적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촛불시위나, 진중권을 비롯한 여러 진보적 인물들을 비판하는 글을 보수언론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 작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

최근에는 인터넷 언론매체인 빅뉴스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백분토론 같은 시사토론 프로그램 등에도 보수적 성향의 패널로 가끔 출연하고 있다. 그 밖에 최근 "실크로드 CEO포럼"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대표로 활동 중이며 모임 이름에서 따온 '실크세대론'을 주장한 글을 언론 매체에 기고한 바도 있다.



  • 진보에서 보수로 변신한 '꺼삐딴변' 변희재
  • 돌아선 분, 헤매는 분, 종잡을 수 없는 분
  • 변희재 “노 전 대통령 국민장 안 돼… 자살은 조폭적 사고방식”


  •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B3%80%ED%9D%AC%EC%9E%AC





    지만원(池萬元, 1942년 11월 20일 ~ )은 대한민국군인 출신 공학자이며 군사평론가, 사회기관단체인이다. 정치 경력으로는 시스템미래당 대표로 활동하였고, 1990년부터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 시스템클럽의 대표 등을 맡고 있으며, 언론활동도 하고 있다. 강원도 횡성군 출신.


    1966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되었으며, 미국 해군대학원(Naval Postgraduate School)에서 행정과학(Administrative Science) 석사과정(1974년~1975년)을 마치고, 경영과학(Operation Research) 박사학위(1977년~1980년)를 취득하였다.[1][2][3]

    1967년~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관측장교, 작전장교, 포대장 등을 역임하고, 1972년~1974년 정보본부 해외정보 모집장교, 귀국 후 1976년~1977년 국방 PPBS 도입 연구요원, 1981년~1987년 국방연구원 책임연구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7년 육군사관학교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1] 1987년~1989년 U.S.NPS 부교수, 1998년 7월 2일부터 1999년 10월까지 서울특별시 시정개혁위원, 1998년 11월 1일부터 1999년10월 30일까지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1]

    2007년 시스템미래당을 창당하여 대표를 역임했다. 1990년~현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군사평론가, 시스템클럽 대표 등에 재직중이다.





    논란 거리

    [편집] 친일발언 관련

    [편집] 문근영 관련

    • 2008년 11월 14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기부천사 좌익세력의 작전인가?〉란 글을 통해 연예인 문근영씨의 외조부 류낙진의 빨치산 행적을 사회기부활동과 연관시켜 비난한 일로 구설에 올랐다. 이 와중에 진중권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자 지만원은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소하기에 이른다.[4]
    • 2009년 3월 7일, 검찰은 고소를 기각, 진중권은 7일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띄운 글을 통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1. 정보통신망 (명예훼손) --- 혐의 없음, 2. 명예훼손--- 혐의 없음, 3. 모욕--- 죄가 안 됨, 이런 내용입니다"라고 밝혀졌다.[5]

    [편집] 5.18 광주 관련







    진중권(陳重權, 1963년 ~ )은 대한민국문화평론가, 대학강사, 철학자이다. 인터넷방송 활동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비평활동 등이 잘 알려져 있으며 《미학 오디세이》등의 저서가 있다. 중앙대학교카이스트의 겸임 교수로 재직하였다. 가족사항으로는 독일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1남을 두고 있다.




    1963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작곡가 진은숙, 음악평론가 진회숙의 친동생이다. 198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고, 1992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 문학예술연구회,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활동하였다.

    1993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94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에서 미학, 해석학, 언어철학을 공부하며 '언어 구조주의 이론'으로 박사과정을 밟던 중 수료하고[1] 1999년 10월에 귀국했다. 독일 유학 과정에서 세 살 위의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하였으며, 1999년부터는 김정란, 홍세화, 김규항 등과 함께 아웃사이더를 만들었다. 이후 정치사회비평지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1]

    인터넷언론 등 다양한 매체에 사회 문제나 미학에 대한 기고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때 민주노동당의 당원이였으며, 현재는 진보신당의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2008년 대한민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해 왔으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진보신당의 인터넷 생방송 '칼라TV'를 진행하고 있다. 5월 31일의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2009년 현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겸임 교수(독일어를 전공한 것이 아니라 미학을전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겸임교수를하고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중이다.[2]





    비평 활동

    [편집] 우파 지식인에 대한 비평활동

    진중권의 본격적 비평 활동은 1997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시 《인간의 길》의 저자 이인화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문예지 《상상》에 서양미술에 나타난 악마주의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다. 그는 이 청탁이 "서태지 음반을 거꾸로 돌리면 악마의 메시지가 나온다고 미신 퍼뜨리던 광신도들"을 비판하는 글로 생각했지만, 실제 책에서는 박정희를 찬양하는 글 사이에 그의 글이 포함되었다. 이에 진중권은 반론을 요청했지만 이인화에 의해 거절되고, 대신 《문학동네》에 반론을 싣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선일보 비판 부분은 삭제된 채 출판되었다.

    이후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지식인들에 대한 비평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이러한 활동의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1998년에 발표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다. 여기서 진중권은 조갑제 등 우파 지식인들을 '극우파'로 정의하고 그들을 신랄하게 공격하였으며,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언론권력과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 파시즘을 비판해 왔다.[3]

    [편집] 2000년대 이후 활동

    그 후, 대한민국의 군사문화와 획일주의 문화 그리고 황우석 사태디워 논란, 미국산 쇠고기 협상 논란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문화현상 및 사회현상에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8년 3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양촌리 김회장 댁 둘째 아들”이라며 특유의 화법으로 비판하였다. 배우 유인촌을 긍정적으로 묘사해온 이 말은 졸지에 장관 유인촌을 비꼬는 말로 변했다. [4]

    2008년 6월 단박인터뷰에 나와 촛불시위에 동참해 비평활동을 벌였다. [5]

    [편집] 영화 디 워 비평

    이 부분의 본문은 디 워입니다.

    그는 2007년 8월 9일 MBC <100분토론>은 ‘디 워,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라는 주제로 방송할 당시청년필름 대표 김조광수, 스포츠조선 김천홍 기자, 문화평론가 하재근 등과 함께 패널로 출연했다. 이때 디 워의 작품성을 놓고 '기본 플롯과 스토리에 문제가 많고, 애국주의-시장주의-CG-인생극장 등의 코드만 있지, 영화에 대한 철학이나 내용은 없었다', '마치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험이다', '비평할 가치가 없는 영화인데 댓글 때문에 꼭지가 돈다, 엉망진창이다, 개판이다' 며 비판하였다.[1][6].[7] 한편 네티즌들은 '진중권 교수가 평론가고 지식인이면 한사람의 열정이 담긴 영화를 그렇게까지 비판해야하는가', '진 교수는 시장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괜한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 아닌가란 오해가 든다' 등 그의 발언 대한 비판 여론을 가하였다. 또 다른 누리꾼들은 '긍정이 있으면 비판도 있는 법이다. 평론가는 어느 한 쪽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비평을 가하는 것', '솔직히 <디 워>가 볼 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희망’으로까지 불리기에는 민망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며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1]

    진중권의 디워 비판에 반발하는 네티즌들의 격렬한 반발에 봉착하였다. 진중권은 '디 워’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려면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정상인가' 하며 문제를 제기[8]하였으나 황우석 사태 당시의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라는 분석과 지식인의 오만이 더 문제라는 비판도 있다.[8]


    진중권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든 지만원 씨 집안…"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B3%80%ED%9D%AC%EC%9E%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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