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4. 3. 1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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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는 예전에는 세계2위도 하고 그랬는데,, 최근에는 별로 두드러진 성적이 없다,,

아무래도 여자 체육 유망주들이 보다 쉽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골프 같은 종목으로 많이 간 탓도 있으리라,,,

결국

여자농구는 뚜렷한 비젼이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순수 학교 체육에서 여자농구가 활성화 되는 거 같지도 않고,,,


박신자씨가  주한미군 문관과 결혼을 하였구나,,, 아들이 예일대를 나왔다고 하니.. 공부를 잘하는 집안내력이 있는 모양이다,,


미국에서 체육으로 유명한 메샤추세츠 스프링필드대학 체육학과 석사를 가지고 있다,,


세월의 변화와 함께,, 한국에서의 스포츠 종목의 운명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박신자씨의 인생이다,,




박신자 
전 농구감독, 전 농구선수
74세 (만 72세) 여성 염소자리 뱀띠
출생
1941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 1969

스프링필드대학대학원 체육학과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 1965

숙명여자대학교 영문학 학사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중학교




위키에서,,


박신자
(1941년 12월 26일 ~ )는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였다.

1967년 한국이 체코 프라하에서 벌어진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세계 2위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둔 것이다. 숙명여중고와 상업은행을 거치는 동안 한국 여자 농구의 상징이었던 등번호 14번의 박씨는 세계대회 첫 MVP에 오르며 ‘국력의 상징’이 됐다. 당시 한국 대선과 맞물려 ‘한국농구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당시 한국팀의 평균신장은 1m68. 이에 비해 대부분 동유럽팀의 평균신장은 1m90을 넘었다. 1m76의 박신자를 앞세운 한국은 비록 당시 소련팀에게 패했지만 탄탄한 기본기와 두뇌플레이로 체코동독유고슬라비아를 차례로 눌러 기술농구의 우위를 세계에 알렸다.

그는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준 뒤 26세의 나이에 농구코트를 떠났다. 이미 64년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월드 베스트5’에 선정된 뒤 은퇴를 고려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3년을 더 뛰었다. 1967년 11월 2일. 그의 은퇴 경기가 벌어진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7000여명의 농구팬이 운집, 대스타의 고별을 지켜봤다.
 

박신자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숙명여대 영문학과 이화여대 대학원 체육학과를 나왔고 주한미군 문관인 브래드너와 결혼한 뒤 도미,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대학원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1978년부터 3년간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도 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때는 조직위원회 농구담당으로 행정과 외교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1999년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 32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테네시주 락스빌에서 6월 문을 연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999년 7월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개막식 시구가 유일한 대외행사 참석하였다. 1999년 8월 예일대학교를 나온 막내 아들 앤드루가 하와이에서 결혼,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박씨는 ‘흰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건강한 할머니’로 불리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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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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