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08. 9. 17. 18:37
로스차일드가의 비밀

















 

인류 역사상 황금만능 또는 재벌정치를 처음 실현한 시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렌스의 거부 메디치(Giovanni de' medici)를 꼽을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M.A.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본명은, Mayer Amschel Bauer) 라고 단언할수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세계 의 역사를 계속 창조하며 실질적인 황제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스차일드는 돈 을 버는데 천재적인 자질이 있었는데.그의 후손들도.마찬가지 였습니다~

일단은..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로스차일드 은 174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마을에
서 모세스 바우어( Mayer Moses Bauer )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른 독일지역같으면..150명정도가 살았을 그지역에.무려 3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살았지요.


더욱이 그들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특별세금을 내야 했고 나치독일의 영화에서 나오는 노란색 의 유대인표식을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또한 프랑크푸트의 다른지역을 지나갈때에는 유대인은 돈을 내야 지나갈수 있었으며,외딴길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보다 어리더라도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프랑크푸트는 다른지역에 비해서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나은 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에는 각 지역마다 영주가 있어서 별도의 법을 갖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 의 아버지는 이러한 지역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고, 그 가게에는 붉은 바탕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진 방패모양의 간판이 달려 있었고 가게 이름이 붉은 방패(Rot-Schild)가 된것이다. 이것이 후에 그의 성 로스차일드 가 되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10세부터 부모가 시키는데로 유대교의 라비(rabbi,유대교의 율법사,율법학자)양성학교에 들어가 공부했으며 20세가 체 되기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중도에 학업을 중도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하노버에있는 오펜하이머란 유대계은행에 취직함으로써 평생 은행원으로서의 편한한 생활이 보장되었다.그러나.

그는 곧바로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와서 그의 아버지가 하던 고물장사를 동생들과 함께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헌옷 골동품 가구등의 물품을 취급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에다른 행정지역의 돈과 엽전도 사다가 팔았으며
취미를 겸해 옛날 훈장을 사들여 광을내고 장식한 다음 귀족들에게 골동품이나 기념품등으로 판매했다
.
그러면서 점차 돈을 벌어 경제적안정을 이루었으며 귀족들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당시의 독일은 여러개의 작은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중 프랑크푸트 지역에 황태자 빌헬름은 부인인 덴마크 공주와의 사이에 낳은 3명의 자녀외에도 여러명의 애인으로부터 낳은 20명이상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기며 돈을 물쓰듯이 쓰는 난봉꾼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언젠가 왕이 될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 간파했고.돈도 안전하게 훨씬 많이 벌 수 있을뿐 아니라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힘도 키울수 있다고 판단한것이다.


 


특히 왕이 황태자의 가족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그들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충성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그는 이러한 판단을 실천에 옮겼고 빌헬름황태자로부터 특별허가를 얻어 자기 가게에서 세금을 걷는 대행업을 하는 동시에 소규모의 금융사업을 벌임으로써 그는 독일 사회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부자행세를 할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얼마후 황태자는 황제가 죽고 난 다음 벨헬름 9세 로 즉위하면서

당시 돈으로 약 4천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고, 미국독립전쟁때 자신의 군대를 빌려준대가로 300만불 받기도 했지만

얼마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전유럽을 휩쓸기 시작해 드디어 1806년에는 빌헬름9세의 작은공화국 헤세하나우 마저 점령하였다.



빌헬름 9세는 처가인 덴마크로 피신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데루스 라는 재무관에게 돈을 맞겼고.




부데루스는 그 막대한 돈을 빌헬름 9세가 필요할때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로스차일드 은행에 맡겼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는 세계의 거부 금융가로 행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스차일드는 5명에 아들과 5명에 딸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암셀은 독일에서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통일 독일의 재무장관 이 되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오스트리아에

셋째 아들 나탄은 영국에
넷째 아들인 칼만은 이탈리아에..

다섯째 아들인 야콥은 프랑스로가 각각 그 나라에서 귀족이 되거나 경제권을 장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나라에 있는 형제 들과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돈을 벌기도 하였는데...지금으로 말하면 다국적 금융기관이 되어 국제 대출업을 한셈 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임스 로스차일드(프랑스로 간 야콥의 자손)의
1850년도 자산 규모는 6억프랑으로 이는 나머지 전 프랑스 은행의 자산을 모두 합한것보다 무려 1억5천만프랑 이나 더 큰액수 였습니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금력으로 그나라에 통치자들로 부터 검열없이 국경을 드나들수 있는 특권을 얻기도 했는데 심지어 적국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 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통신을 중요하다는 사실을간파하고 비밀리에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대 로마제국시절부터 이용되어 온 방법으로 그 무렵에는 거의 잊혀진 방법이었지만..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유럽각 나라에 분산되어있는 형제들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잘 훈련된 비둘기를 사용하게 된것입니다.

다시...로스차일드 애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아까 빌헬름9세가 그에게 맡겨둔돈 은 그당시..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그런데 그는 빌헬름9세의 요구대로 그돈을 숨겨두는 대신 다섯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아들중 셋째아들 나탄은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통해 그 돈으로 많은 금들을 사들이고..
나폴레옹 1세와 전쟁중이던 웰링턴 공작에게도 군비를 빌려주었습니다..


 

반면 프랑스에 간 나탄의 동생 야콥은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나폴레용에게 군비로 빌려준후,



1815년 워털투전투에서 나폴레옹과 웰링턴의 결전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위력이 너무강하므로 십중팔구 영국이 위털투전투에서 패할것으로 생각했고.........


워털투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는것을 지켜본 로스차일드의 사자는그길로.비둘기를 보내 영국에 있던 나탄에게 보고하고 그 소식을 접한 나탄은 즉시 런던의 주식시장에 여느때 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비장한 표정을 한참 생각하는듯 하더니 팔아라 라고 외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모두 나탄이 팔라고 할때에는 분명히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때문에 짐작하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주식을 팔려고 했고....이렇게 모두 팔겠다고 나서자 주식시장은 수라장이 되었고 그 결과 주식가격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그러자 나탄은 미리 비밀조직을 조직해 놓은 다른 회사의 명의로 그 주식들을 몽땅 사들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월링턴이 보낸 사자가 승전소식을 알리자...


영국전체는 국민들의 환호성으로 뒤덮혔고..그리고 주식가격은 하늘로 치솟듯 뛰어 오른것은 물론이며.나탄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주었습니다..

이때를 빗대어 사람들은
나탄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고 평할정도 였습니다..나탄은 영국에 온지 17년만에..
처음 갖고 있던 돈을 2천 5백배로
불렸다고...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이런한 경험을 통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에서 돈 버는 방법을 터득했고 전쟁이 터지면 항상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은 지게 마련이며 양편에 돈을 빌려주었을 경우 패전국은 빌려준 돈의 이자보다 휠씬 많은 금액을 승전국에게 지불하게 되었습니다..전쟁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만약 패전국이 그럴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정부에서 국민들의 세금을 더 거둬들여 지불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재벌정치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가장 안전하게 큰 돈을 벌수 있는 방편이였죠...





그리고 로스차일드는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실행했던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개인을 상대로 하는것보다 훨씬 안전할뿐 아니라 이익도 많다고 생각했죠..해당국가의 세금으로 안전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죠~~





그때부터..로스차일드 가문은 항상 전쟁을 일으키고.막후에서 일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주면서 막강한 군대를 양성한다음,이웃국가와.실력대결을 벌이도록 충동질 하는것은 물론이고 이는 지금도 그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그들의 권한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어
돈을 빌려줄때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격에 해당하는 증서만 써주고 그 신용에 의해 물자를 살수있도록 해주면..그만인 것이다...

이것이..바로 부분지준은 제도 라 한다..현재 세계은행과.
IMF,BIS등이...이렇게 하므로써..국가에 빚은..더욱 커져만 가는것이다~~~~


그리고 부분지준은 제도에 대해서는 참고적으로..이 장 마지막 부분에...서..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로스차일드는 유대인으로써 핍박받던 기억을 잊지 못해서인지.그 아들인 나탄의 방법이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특히 경제적 거두가 되어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후로는 알루미나티 의 아담 와이샤우트의 경제적인 지원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와이샤우트가 일루미나티를 조직하는 계획을 뒷받침해 주었을뿐 아니라 프리메이슨엘리트 들을 동원해
유럽각국의 왕실과 정부를 장악했던것이다
...


 


아울러 그즈음..미국이 독립하여 광대한 땅을 소유한 강대국으로 두각을 나타내자...이를 간과할리가 없는 로스차일드 가문은..미국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야콥 시프(Jacob Schiff)란 청년을 뉴욕으로 보내 미국의 총책으로 맡겼다...

그는 프랑크푸트에 있는 로스차일드의 집에서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같이 살던 라비의 손자였다..


야콥시프는 몇년 동안 미국을 관찰한 다음 쿤롭 이란 유대계 금융회사를 선택해서 동업자로서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쿤롭사는 원래 마차를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종의 서민금고식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후 야콥시프는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하여 전 미국의 경제권을 장악해 나갔는데 그 일환으로 뉴욕증권시장과 기업체에 대한 대출업무를 시작했던것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2천만달러를 투자
뿌렸다는 이야기를 죽기 얼마전 자랑삼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은행가 J.P모건(John Piermont Morgan)이었다..
그의
아버지 J모건은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으로 유명한 조지피바디 와 동업으로 금융사업을 벌였으며 남북전쟁때는 링컨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어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모건은...철강산업의 카네기...철도산업의 헤리먼...
석유산업의 록펠러등 세계굴지사업가들에게 자금을 대준 장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J
.P모건도..야콥시프가 조정한 대로...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1902년 로스차일드가문은 독일계 유대인 와벅형제. 둘째 폴와벅과 막내 펠릭스 와벅 을 미국으로 보내...야콥시프의 뒤를 잇게 했는데...
와벅형제는 결혼을 통해..롭가문 및..시프가문과 인척을 맺어 미국경제계의 귀공자로 활약했습니다..



와벅삼형제중...첫째는..독일에 그대로 남아..화벤(I.G.
Faben. 오늘날...Hoechst.Bayer.BASF)의 전신 이란 화학회사의 대표가 되었고
. 그 후 미국에 있는 다른형제들과 합작하면서..나치독일의 재벌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 연합군의 치열한 폭격하에서도 독일의 화벤사는 무사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후..나치에 협력했던..독일인들은 모두 전범으로..처벌받을때도..미국 자본과 결탁되있던.그들은
그 대상에서..제외 돼어던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1차세계대전후 처참한 상태에 놓여있던 독일이 히틀러 정권을 장악한후 불과.6년만에 전쟁을 일으킬정도로 막강한 세계부국이 되누 이유도 미국의 대기업들이 돈을 대주었기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은 대 공황을 맞았는데..이러한 자금조달을 하기 위해서..미국의 대 공황을 조장하였다는 사실은..대부분의 미국 국민들과..세계인들도.거의 대부분..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로스차일드는 명실공히..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주요국가들과..미구에 각각 책임자들을 지정하고..
그들을 재벌로 만들었고
그리고 아프리카.남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은 자원을 공급하고 생상품을 소모하는 지역으로
여겼던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세실로드라는 사람을 보내어 다이아몬드 광을 위주로 막대한 돈을 벌고..정치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원탁회의 중동자로 삼았다..(원탁회의)에 대해서는 정치쪽으로 넘어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물론..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한편 남미 미국사업가들을 앞세워 점령시켰으며 각국 중앙은행들을 모두 소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 건국의 기둥일뿐 아니라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건국에 필요한 모든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후로도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조직으로 손꼽히는 모사드(이스라엘의 비밀 정보국)의 예산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미국에서도 케네디 가 두형제를 암살을 자행했습니다..(이유는 정치편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문의 권력 규모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지금 들었던 예들은 아주 적은 예 이며...
앞으로 세세한 설명들이 나갈것입니다..


그리고..로스차일드 가문은 지구의 주인 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막대한 돈과 세력을 쥐고 있지만 세상사람들은 그 가문의 위력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 만큼 그들은 뛰어난 위장 전술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출처
다음블로그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

로스차일드 가문은 조상 대대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트)`를 집 앞에 내걸었다.

그것이 영어식 발음 `로스차일드`의 어원이며, 마이어가 훗날 이것을 성으로 사용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한 마이어를 랍비로 키우기 위해 유대 신학교에 보내 탈무드를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마이어는 12세 때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대인이 경영하던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300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탈무드`와 `은행`은 자못 유대인다운 배합이었다.

마이어는 유대 신학교에서 탈무드를 공부하여 중동과 유럽의 역사와 어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던 중 옛날돈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20세가 되자 오펜하임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폐수집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세계 최대의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마이어는 옛날돈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서를 만들어 고객이 될 만한 지배층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그리고 흥미가 없는 사람한테는 옛날돈을 공짜나 다름없이 사들여서,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니다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인 명문귀족 빌헬름 공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그즈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은 유대인 청년이 영주와 귀족을 직접 만나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빌헬름 공은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 등에 용병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하여 수많은 왕족들이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한겨레]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명가문의 조건1 - 로스차일드]

창업자 마이어 암셀로부터 8대째 내려오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떻게 부와 명성을 쌓았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선물이요,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보상이다. 젊어서 낳은 자식은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 같으니,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구약성서 시편 127편)

‘워털루전투 사건’으로 유명해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마이어 암셀(1744~1812년)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유대인 집단거주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교 랍비양성학교에 다니다가 11살 때 부모가 천연두로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가장으로 경제생활에 들어갔다.

유대인 사설금융업자의 도제로서 경험을 쌓은 그는 통일 이전 독일의 제후 귀족 부호들을 상대로 옛날 화폐와 골동품 등을 팔아 돈을 번다.

이와 함께 의도적으로 독일의 권세가들에게 접근해 결국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신임을 얻어 궁정 어용상인이 된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붉은색(rot)과 방패(schild)의 합성어로, 마이어 암셀의 집에 붙은 붉은 방패에서 비롯됐다.

그 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유럽의 군주국가들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자 마이어 암셀은 빌헬름의 빼돌린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이때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야심적이고 모험적인 셋째 아들 네이선(1777~1836년)은 이 비밀자금을 정식으로 투자하기 전에 여러 나라의 국채를 사고 되팔아 엄청난 단기차익을 챙기고 사업적 명망까지 얻는 데 성공한다.
 
네이선은 이 자금으로 채권, 금, 주식, 밀무역 등에 투자한다. 그 뒤 마이어 암셀의 다른 네 아들도 각각 프랑크푸르트(첫째 아들 암셀), 빈(둘째 살로몬), 나폴리(넷째 칼), 파리(다섯째 제임스)로 진출해 혁명과 전쟁의 대변혁기에 가장 이른 시간 안에 주요 정보를 공유한 채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선진금융 기법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워털루전투 사건’일 것이다. 당시 유럽 전역을 무대로 가장 빠른 정보입수-전달 체계를 구축하던 로스차일드상회는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자체 능력으로 런던상회에서 24시간 정도 일찍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1억3500만프랑의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는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나폴레옹 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된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네이선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대 유대인은 한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철저히 유대적인 성공요인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후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권력과의 밀접한 유대관계 등을 활용해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 부를 더욱 늘렸다.

프랑스의 경우 프러시아전쟁에서 패배한 뒤 1871, 1872년 두 차례에 걸쳐 배상금을 조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영국에서는 몇 시간 만에 400만파운드를 영국 정부에 조달해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영국이 전격적으로 인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엄청난 부와 이런 뛰어난 공로를 바탕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유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재벌가문으로 부상한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새로 건국하는 민족적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약 15억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자산은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가문의 국제적 명성과 신용은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을 거둔 요인으로는 이런 것들을 꼽을 수 있다.
 
1. 단결: 가문의 형제들이 하나의 화살묶음처럼 뭉쳤다.

2. 네트워크 경영: 네트워크를 통해 전체의 효율을 최대로 높이고, 위험을 분산시켰다.

3. 신용경영: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해 신용을 쌓고 다음 단계에 더 큰 거래를 장악했다.

4. 정보경영: 가장 정확한 정보로 가장 빠르게 사업기회를 잡아나가는 선진 경영기법을 동원했다.

5. 정경유착: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권력자와의 인맥을 형성해 사업기회를 잡는 데 능숙했다.

6. 2세 체제 준비: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경제교육(상황에 따라선 실무교육까지)을 시켰다. 이런 요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유대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형제들이 뭉치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족경영 방식과 일치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회사 이름을 보면 ‘로스차일드 부자상회’ ‘로스차일드 형제상회’로 돼 있다.

실제로 월가에서 활동하는 레만 브라더스 은행도 이름 그대로다.

유대인들은 혈육이 같이 사업을 벌여 성공하거나 먼저 성공한 사람이 다른 형제를, 사촌을 차례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사업을 발전시키곤 한다.


어려서부터 실전형 경제교육을 받다

네트워크 경영은 당시 유대인이 처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유럽 각국에서 박해받는 소수였던 유대인들은 국가간 이동을 자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동과 이주에 따라 도시마다 유대인 거주지역과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었다. 바로 이 시나고그 등 유대인 공동체가 시대 변화에 따라 중요한 경영 거점이 된다.

자연발생적인 유대인의 상공회의소, 정보시장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시대 변화에 따라 유대인의 존재 방식이 실제로 새로운 경영에 대단히 유용하리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 대응한 것이다.

정보경영은 역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지적 자산을 축적하거나 계승하고 공유해온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게토로부터의 해방, 산업분야로의 본격 진출, 정치적 권리의 확대 등을 가능하게 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닥쳐온 이런 기회들에 과감하게 대응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 역량을 최대로 결합해 승부한 것이다.

그들은 전체의 대세를 정확히 읽고 거기서 벌어지는 개개 사안의 주요 정보를 일찍 파악해 유럽의 전통적인 은행이나 자본보다 훨씬 과감하고 빠르게 투기에 나서 성공한 것이다.

2세들에 대한 경제교육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로스차일드의 경우 제2대 격인 ‘5발의 화살’ 형제들이 모두 어려서부터 실전형 경제교육을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 암셀의 사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돼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유대인의 경제교육은 거의 원초적일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삼는 모세 5경 가운데 하나인 ‘민수기’를 보면 금방 이해할 만하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20살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남자를 다 계수하니 4만6500명이었다. …시므온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계수하니 5만9300명이었다. …갓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계수하니 4만5650명이었다. …” 이런 성경 구절을 어려서부터 읽고 암송해온 유대인에게 숫자는 인생의 기초이자 곧 돈벌이의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왜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나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창업자 격인 마이어 암셀로부터 대략 8대째에 이르고 있다. 가문이 초기의 활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선 2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800년대 후반 정세 판단을 잘못해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진출에 대해선 ‘5발의 화살’ 형제 가운데 3남인 네이선 못지않게 사업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5남 제임스가 자신의 장남이 낸 미국 진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둘째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선조들만큼 뛰어난 경영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해선 조심스럽게 가문 내부의 근친결혼 관련설을 거론하는 의견도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상회의 창업자 격인 제임스가 조카딸과 결혼하고 그 딸이 다시 사촌과 결혼하는 등 근친결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토록 구대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신은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법일까?


유대인, 지독한 부자들 로스차일드 이외에도 많은 경제인들이 세계 경제에서 강력한 힘을 과시해왔다.

특히 20세기 초반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감에 따라 미국에서 유대인 부호도 많이 나오고 있다. 퀀텀펀드를 설립해 운용하는 헤지펀드의 귀재 조지 소로스도 유대인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최상급 대우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창업자 겸 회장인 래리 엘리슨도 유대인으로 2000년 당시 자산 약 580억달러를 보유해 미국 제2위의 부자로 집계된 바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로부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물려받은 스티븐 발머, 델컴퓨터의 창업주 마이클 델, 복합 미디어 그룹인 비아컴의 회장인 섬너 레드스톤, 하얏트호텔 체인 등 시카고의 부동산 재벌인 마몬그룹을 소유한 로버트 프리츠커와 토머스 프리츠커도 유대인이다.

블룸버그통신의 회장이었다가 지금은 뉴욕시장으로 선출돼 재임 중인 마이클 블룸버그, 세계적인 화장품 에스티로더의 회장인 레너드 로더,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역시 유대인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로렌스 부시는 1998년 기준으로 유대인이 소유하거나 직접 경영하는 기업이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8~10%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개인 소유 재산으로 본 ‘미국 자산가 상위 400명의 부호 서열’(경제잡지 <포브스> 2000년 10월 간행)을 분석하면 이 가운데 적어도 64명, 16%가 유대인인 것으로 집계됐다.

실제로 미국 전체 인구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2%를 조금 넘는 점을 감안하면 부호 집적도가 가장 높은 민족그룹에 들어간다. 미국의 우량 헤드헌팅 회사인 토머스 네프가 1999년 발표한 ‘미국기업 리더 베스트 50인’ 가운데 유대인은 적어도 8명, 즉 16%였다. 이 조사에서 유대인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델컴퓨터: 마이클 델(기업명: 경영자)

#월트디즈니: 마이클 아이스너

#GAP(의류 소매): 도널드 피셔

#베어 스턴스(투자은행): 앨런 그린버그

#AIG(보험): 모리스 그린버그

#인텔(반도체): 앤디 그로브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시티그룹(금융 증권): 샌포드 웨일



전용홀더채택으로 귀차니스트에게딱~~~!!  이런 책갈피 봤어??

posted by 공릉역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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